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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Aug 27. 2021

오빠씨, 난 이제 지쳤어요

- 버스는 때 되면 떠나고 기다리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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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말들08]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방언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은 곧 방언입니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온기, 향기, 열기를 짧은 글 속에 담아봤습니다. 우리 삶의 힘이 될 수 있는 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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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은 요즘 세상에는 별로 어울리는 속담이 아니다. 반드시 남녀가 짝을 맞춰야 한다는 신념이 있던 시절에는 쓸모가 있었지만 요즘은 꼭 짝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갖신, 꽃신, 고무신 다 놔두고 사람을 짚신에 빗대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노래가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은 어떨까? 누군가 불렀던 노래가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다른 이가 불러서 갑자기 떴다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다.


가수 강진이 불러 히트를 시킨 <땡벌>이 그렇다. 원작자나 원가수가 따로 있는데 강진이 주인이 된 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리 되면 이전 가수가 바보가 되거나 서글퍼질 수 있다. 그 좋은 노래가 주인을 잘못 만나 빛을 보지 못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의외다. 곡을 짓고 처음 부른 이가 국민가수라 일컬어지는 나훈아다. 다른 이의 죽어가는 노래도 심폐소생술로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은 나훈아인데 노래의 빛을 바래게 한 주인공이라니......


본래 노래도 좋고 다시 부른 이도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영화 <비열한 거리>의 주인공인 조인성의 공을 외면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는 노래지만 그 멋진 모습으로 불러대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를 보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중독성 있는 가사가 입안에 맴돌게 된다. 그리고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후렴처럼 ‘땡벌 땡벌’을 외치게 된다.


그런데 땡벌이 뭘까? 표준어로는 ‘땅벌’이라 하는데 땅에 집을 짓고 산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사는지라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봤을 법한 녀석이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니 방언형도 무척이나 다양한데 ‘땡벌, 땃벌’은 전국에 걸쳐 나타난다. 땅에 구멍을 뚫고 산다 해서 ‘구무벌, 굼버리’ 등으로도 나타나고 ‘바때리, 바느래’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어형들도 기원이 궁금하지만 ‘옷바시, 옷바수’ 유형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심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샘, 아무래도 제가 샘하구 방언조사를 너무 많이 다녔나 봐요.”

“졸업한 지가 언젠데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방언조사 타령이야. 잘 지냈어?”

“잘 지내지 못했는데 슬퍼야 할 순간에 샘과 다닌 방언조사 생각이 나니까 그렇죠.”

“뭔데? 헤어졌어? 걔랑?”

“오빠, 난 이제 지쳤어요. 걔가 헤어지자고 할 때 한 첫마디예요.”

“그럴 만도 하지. 내 동생이라도 그렇게 하라 하겠다.”

“난 이제 지쳤어요 옷바시 옷바시...... 선생님 이 노래 아시죠? 그 말을 듣고 전 이 노래를 속으로 불렀어요. 미친놈처럼.”


서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 녀석 벌써 아재가 된 것일까? 허무하기 그지없는 개그를 날린다. 그런데 둘이 헤어졌다고? 늘 꼭 붙어다니는 것은 물론 서로 딴손잡이여서 수업시간마저도 손을 꼭 잡고 필기를 하던 커플, 둘 다 너무도 착하고 사랑스러워서 학생들은 물론 학과의 선생들도 응원하던 커플이었는데 헤어졌다고? 재학중 3년도 모자라 졸업 후 7년이 넘도록 늘 그 모습이었는데 헤어졌다고?


요즘 학교에 캠퍼스 커플이 넘친다. 옛날에는 쉬쉬하면서 사귀었는데 요즘은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사귄다. 빨리도 만나고 빨리도 헤어졌다 또 다시 만난다. 물론 다시 만나는 사람은 바뀔 수도 있다. 이런 것이 일상이니 괜한 관심을 가지고 ‘걔랑 잘 지내?’라고 묻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될 수도 있다. ‘걔’가 누군 줄 알고 질문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 커플은 아니었다. 졸업 후에도 예쁘게 만나고 있다는 소식이 늘 들려왔으니 ‘걔랑 잘 지내?’라고 묻는 것이 당연한 인사였다.


그런데 ‘오빠, 나 이제 지쳤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단다. 기다리다 지칠 만도 한가? 졸업 후 진학한 로스쿨, 그리고 로스쿨 졸업 후 ‘변시낭인’ 4년이면 지치기에 충분한 시간인가? 그런데 무엇을 기다리다 지친 것일까? 변시 합격? 신혼집 마련? 청혼? 현실적으로 보면 그렇다. 변시에 당당히 합격을 하고 어떻게든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무릎 꿇고 청혼 반지를 내밀어야 ‘남자’다. 그런데 이 녀석, 모든 게 아니다. 이제까지 한 게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아니다. 그런 것을 기다리다 지칠 아이가 아니다. 이 녀석은 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안타까워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흔들리거나 지칠 여자애가 아니다. 졸업 후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생각이 바뀔 아이도 아니다. 졸업 후 가끔 만나서 얘기를 나눠본 바로는 그렇다. ‘오빠’에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그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빠가 아파할까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걔가 떠난 거야, 아니면 니가 보낸 거야.”

“…….”

“못난 놈, 떠나라고 난리굿을 했구나.”

“미안하잖아요. 너무.”

“만날 때마다 맨날 미안하단 소리만 했지? 그렇게 말하면 니가 착한 놈이 되냐? 그렇게 말하면 걔 마음이 편해지겠냐?”

“미안하다는 말 말구 무슨 말을 해요 그럼.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몇 년짼데.”


예상했던 대로다. 녀석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상황, 그런데 만날 때마다 한숨을 폭폭 쉬며 미안하단 말만 늘어놨던 듯하다. 말은 안했지만 자신 없으니 떠나라고 무던히도 괴롭혔던 듯하다. 딴에는 그게 배려라고 생각한 듯하다. 찌질한 녀석이라고 욕하고 싶지만 차마 못하겠다. 그 나이, 그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럴 법하다.


“니가 착한 놈 되겠다고 걔가 열녀가 될 기회를 뺏었잖아.”

“…….”

“니가 찌질하게 굴어서 걔가 화끈하게 뻥 찰 기회도 뺏었잖아.”

“…….”

“괜찮아, 버스는 때 되면 떠나고 기다리면 와. 노래방 가서 땡벌이나 불러.”


선생이란 자가 학생만큼 찌질하다. 위로를 해야 하는지 책망을 해야 하는지 헷갈리니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국어선생답게 ‘회자정리(會者定離)’니 ‘거자필반(去者必返)’이니 하고 싶지만 너무 고리타분하다. 떠날 사람은 언젠간 떠나고 만날 사람은 언젠간 다시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 살아보니 그렇다. 그러나 마냥 아파하는 녀석에의 귀에 들어갈 말은 아니다.


버스 비유도 너무 촌스럽다. 그런데 이미 출발한 버스 뒤를 한참을 따라가다 결국 놓치고는 발길질을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버스는 기다리면 또 오는데..... 그런데 이 녀석은 버스를 따라가다 놓친 게 아니라 떠밀어 보내놓고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상황도 다르다. 그런데 진심이다. 그렇게 보내려 애쓰고 지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사이도 결국은 떠날 사이기 때문이다. 정말 죽도록 좋아했으면 그렇게 떠나라고 난리를 치지도 않았을 테고 그것 때문에 지쳐서 떠난다고 하지도 않았을 터, 결국 그게 둘에게 허용된 인연이다. 차마 말은 못했지만 잘했다.


그런데 걱정이다. 노래 <땡벌>을 들을 때마다 ‘난 이제 지쳤어요 옷바시, 옷바시’가 맴돌 듯하다. 그리고는 이 커플 생각 때문에 또 아플 듯하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 있다. 꼼짝없이 주례를 서야할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내 수업에서 처음 만난 사이고 나와 함께 방언조사를 같이 다니면서 가까워진 사이니 빼도 박도 못할 뻔했다.


한 이년쯤 지났을까? 녀석한테 문자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샘 저 취직했습니다. 축하해 주세요 ㅎㅎ  글구 양복 한 벌도 준비했슴다 뭔지 아시죠? ㅎㅎ 조만간 같이 가겠습니다


만날 장소와 시간만 잡았다. 변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변호사 되기는 포기한 듯하다. 잘 선택했다. 어차피 변호사의 꿈도 결국은 떠날 꿈이었다고 말해야겠다. 버스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그 아이와 다시 만났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만났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 상대가 ‘거자(去者)’이든 또 다른 ‘회자(會者)’이든 잘 선택했다. 어쨌든 양복 차려 입고 ‘검은 머리 파뿌리’를 얘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먼 훗날 돌싱이 됐다고 찾아와도 할 말은 “잘했다.” 하나다. 어차피 만날 사람은 만나고 떠날 사람은 떠난다. 백년의 반쯤 살아보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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