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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온 Nov 02. 2023

부장님 챗봇은 아니잖아요

돌아와요, 재택 근무

회사 생활의 황금기는 코시국이었다. 코로나라는 잔인한 놈은 '재택 근무'라는 축복도 함께 주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와, 출퇴근에서 해방이다. 꿈인가 생시인가 웬 떡인가. 부려대는 사람을 안 보고 회사 생활이 가능한 건 기적이었다.

 

 "이 프로, 어디 있나?"

 "이 프로, 이리 와 봐!"


이런 호출은 이제 안녕이다. 대면하는 건 오직 PC 화면이었다. 이 녀석은 일도 잘하면서 과묵하다. 완전 내 스타일이다. 내 이름은 로그인할 때 한번 띄주면 그뿐이었다. 누가 불러댈까 귀를 쫑긋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업무 요청은 메일로 착착 전달되었다. 소소한 업무 협의는 메신저로 이어갔다. 회의는 줌 미팅이 대신했다. 올레, 내 일만 잘하면 되는 세상이 왔다. 누구의 궁금증이나 심부름을 해결하러 나서지 않아도 된다니. 내게 강 같은 평화가 넘치던 호시절이었다.


그때가 모두에게 호시절은 아니었다. 부장님과 팀장님은 재택 근무를 꼬박 반납했다. 대놓고 말만 못 할 뿐, 재택을 꽤나 싫어하셨고, 돌려 까기로 눈치도 줬다. 팀원 절반이 자리에 없는 꼴 자체가 심기 불편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대리', '김 과장', '박 차장' 불러대며 훈계와 지시와 잔소리 그 어디쯤을 시전 할 특권을 잃었다. 챗봇처럼 답을 뱉어낼 팀원들은 없었고 즉문즉답, 롸잇나우, 아삽이 당연한 그들은 참을 수 없었다. 메신저나 메일로 피드백이 올 때까지 우아하게 기다리지 못했다. 누군가를 닦달할 수 없으니 인내심은 바닥을 보였다. 전화나 줌 회의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재택 반대를 부르짖었다. 얄미운 반동 분자들이었다.


나 같은 말단 사원들은 재택을 절대 사수했다. 회사 막내는 동네 북처럼 불려 다니다 하루가 다 가는데, 재택이 그걸 막아 준거다. 죽일 놈의 막내 인기는 식을 줄 몰라서 이 부서에서 안 부르면, 저 부서에서 찾아대고, 부장님이 안 부르면 상무님이라도 기어이 부른다.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이름을 두 번씩 외쳐대면서 말이다.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되기는커녕 노이로제만 생겼다.


  "이 제품, 스펙이 어떻게 되는데?"

 

다급한 하이톤에 졸아서 가보면 이런 식이다. 겨우 이거 물으려고 부른 거야? 부장님은 손이 없나, 입이 없나, 발이 없나. 구시렁구시렁 목까지 차오른다. 마음의 소리가 얼굴로 나타났다간 책을 잡힐지 모르니 조심하자. 정신을 차리고 구술 테스트를 준비한다. '부장님 업무를 돕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늙은 루키는 쥐어짜 상기된 표정을 세팅한다. 네가 아는 걸 다 까발리겠다는 부장님 앞에서 쇼미더머니 출연자로 빙의한다. 제품 크기며, 무게, 컬러, 가격, 출시일까지 다다다 뱉어 본다. 휴, 다행히 절지 않았다. 이 정도면 프리패스 아닌가. 암기 과목 시험도 아니고, 공부 안 한 게 문제로 나올까 봐 조마조마하다. 부장님이 이런 건 기본이라더니, 모르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신가. 문서  넘겨 보는 게 그리도 어려운 건지. 암기력이 떨어지면 회사 생활도 못할 판이다.


  "김 부장은 이 컨셉이 마음에 든대, 이걸 하겠대?"


남의 생각을 알아내는 것도 내 일이란다. 그걸 알면 벌써 자리 깔았죠. 여기 있겠어요?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확인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탐정 저리 가라 옆 부서를 염탐한다. 말을 저기에, 말을 여기에 전해봤자 결론은 자리이다. 주선자가 엮어 준다고 일도 아니고, 당사자들끼리 만나서 원만한 합의를 봐야

퇴근할 거 아니냐고요. 본인 의견은 저 말고 옆 부서에 가서 당당히 말씀하셔야죠. 새우등만 터지고, 아물기 전에 또 터진다.   


 "이거 5 페이지씩 양면으로 출력해 와"


불러 댈 시간이면 프린트 찾아오고도 남았겠네. 문서 출력,  회의실 예약, 의견 취합, 자료 공유 등 단순 노동도

내 차지다. 그들의 손 까딱을 더는 대신 내 손이 몇 배로 바빠진다. 호출은 미친 듯이 일이 겁나 잘 될 온다.

타이밍을 어떻게 귀신같이 아는 건지. 업무 능률과 리듬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다. 이런 일을 처리하고 나면 맥이 풀려서 되던 일도 된다. 퇴직금 조회 버튼이 어디 있더라. 회사 생활에 회의가 밀려든다.   


재택으로 쇼미 오디션은 이상 보지 않았다. 그들의 궁금증은 메신저나 메일로 처리해 었다. 나도 드디어 손 까닥으로 일했다. 비대면 시대는 우리를 담백하고 아름다운 사이로 만들어 주었다. 주선자로서 당사자들은 메신저에 싹 다 몰아넣거나, 메일 전체 수신으로 합의를 종용했다. 여기서 쇼부를 보든지 말든지 판만 깔아 주면 그만이었다. 단순한 심부름 스트레스도 사라졌다. 궁뎅이 붙이고 일을 진득이 있다는 것, 이것이 재택의 맛이었다.  


재택은 1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재택으로 불러대는 사람이 없자 업무가 줄기 시작했다. 그동안 눈에 보이니까 찾아서 물어 싸고, 얼굴 본 김에 일 주고, 일 시키니 또 부르고 그랬던 거다. 불려 다니니 궁뎅이 붙일 시간이 부족하고, 잔업 생기니 야근하고, 피로하니 카페인과 뒷담화가 필요한 거였다. 얼굴을 못 보니까 안 부르고, 덜 찾으니 그만큼 일이 적어지는 매직은 실로 놀라웠다. 인간 챗봇, 프로 심부름러에서 벗어났던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앞으로 코로나는 우리와 함께 가겠습니다."


이렇게 한 팀으로 결정이 났다. 일상이 회복이 아니라 호출 회복이겠지. 다시 챗봇 생활도 겸직이다. 더 이상 마스크도 쓰지 않는다. 부장님 앞에서 표정 관리도 중요해졌다. 호출과 함께 출동할 때마다 나는 부처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나 그대에게 모두 알려 드리리, 할 수 있는 것 나눠 드리리. 해 보지만 컴백할 때마다 붉으락 푸르락 화 딱지가 나고, 뜨거운 게 치민다. 거칠게 이어폰을 꽂고 '나 건드리지 마' 소심하게 시위해 본다. 드라이브 샤워가 목청이 터져라 부르고 있다. '이런 나쁜 놈, 이런 나쁜 놈, 이런 나쁜 노오오옴!' 따라 부르며 오늘도 아아를 들이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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