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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온 Nov 10. 2023

억울하면 재입사하든가

대감님댁 계약직 노비


무기징역같은 무기 계약직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내 일도 믿었기에

나 아무런 부담없이 출퇴근을 했고

그런 만남이 있은 후부터 우리는 자주 함께 만나며

눈물 콧물 짜며 14년을 일했던 것뿐인데

그런 만남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첫 단추를 계약직으로 끼운 게 실수였다. 번지르르한 타이틀에 마음을 뺏긴 구직자가 여유가 없었나보다. 대감댁이니까 소작농보다 낫지 않을까 싶었다. 입사에 급급해서 직군, 고용 형태까지 따져보지 못했다. 이름에서 주는 신뢰도 무거웠다. 정규직이 아니면 왜 안 되는지, 문제가 뭔지 심사숙고하지 않았으니 나이만큼 뇌도 맑고 순수했다. 단기 계약직이었으면 짧고 굵은 경험이었을텐데, 파견직이었다면 가볍고 편하게 다녔을텐데. 그 때는 몰랐다. 정년과 안정감을 보장하는 무기 계약직의 번뇌가 내 발목을 잡을 줄.


진골은 성골이 될 수 없어


"당신도 우리 팀원인걸요. 당신은 세상 중요한 전문가에요."

일 시킬 땐, 포지션 따위는 생각 말고 열심히만 하란다. 열심히 다 해 놓으면, 치하하는 자리는 그들만의 잔치다. 성과도 그들의 몫으로 나뉜다. 내가 내놓은 결과물은 중요하고, 그 일을 한 나란 사람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갑이 될 수 없는 을의 서러움이었다. 일할 때는 인싸로, 그 외에는 아싸로 대하니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단순한 일을 하며 조용히 맘 편히 지내든가, 많고 중요한 일을 하며 대우받든가 보통은 하나가 일반적일텐데 말이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기로에 내몰렸다.


대감님댁 다닌다면서요? 네, 계약직 노비로요


처음에는 포지션에 대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물어 본다. 대감님이 쌀밥을 주시냐며, 소작료가 올랐냐며, 거기 다녀서 좋겠다며 말을 건다. 어떻게 둘러댈 도리가 없다. 그래서 결심했다. 그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면 시원하게 알리자고. '계밍아웃' 정도 되겠다.

"나 계약직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사람들이 동공 지진과 함께 말을 잇지 못한다. 약직은 약자, 힘든 일 하는 사람,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 등 딱한 이미지라서 어색하게 대화가 마무리된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추가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니 마음도 한결 편하다. 고용 형태의 하나일 뿐인데 직군은 권력, 계급, 사회적 지위로 연결되기에 한 순간에 별 볼 일 없는 초라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대로, 언제까지 괜찮을까


어쩌다 14년째 신입사원처럼 출근하고 있다. 앞에 '무기'라는 말까지 붙어서 징역살이처럼 갑갑하기만 하다. 이 글을 끝맺는 것만큼 이 회사에서의 엔딩이 고민되고 어렵다. 관두자와 관두지마가 하루에도 몇 번씩 싸워댄다. 권한이 없는 건 싫지만 책임도 없으니 즐기며 다닐까 했다가, 계속 막내로 잡일만 해서 뭐해 애나 보는 게 낫지 했다가. 이번 달 월급만, 상반기 보너스만 받고 나서 생각할까 싶기도 하다. 어떤 때는 대우에 비해 심하게 나의 쓸모를 써 먹어서 부화가 나고, 또 어떤 때는 제대로 내 쓸모를 활용해 주지 않아 속이 상한다. '애 쓰고 애 쓴 건, 네 안에 남아 있단다. 괜찮아' 최인아 선생님이 위로를 건낸다. 선생님, 다 아는데요. 솔직히 괜찮지가 않네요. 그냥 그렇다고요. 어떻게 하면 괜찮아질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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