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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온 Dec 09. 2023

이 구역의 미친 년은 나

강약약강에 맞서는 강강약약

온전한 자신 그대로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여 있는 회사에서 나도 모르는 또 다른 자아가 시시각각 튀어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울지 모르겠다. 이중 인격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다른 나', '포지셔닝된 나', '콘셉트에 맞춰진 나'로 대부분은 이중 생활을 하게 되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할 때와 아닐 때, 회사에서와 회사 밖에서는 태도, 마인드, 표정, 성격, 성향, 심지어 말투까지도 달라진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 공격 태세를 바꾸는 것은 동물적인 감각에서 기인했으리라.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캐릭터에 따라 배역을 연기 하는 배우처럼 어떤 프로젝트, 어떤 동료를 만나느냐에 따라 새로운 자아를 불어 넣는다. 간혹 기질 자체가 무던하고, 멘탈이 강하고 주위에 휩쓸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신 그대로와 회사원 아무개의 자아가 다르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 반대라면 다른 자아로 중무장이 필요하다. 순두부같은 재질로 만만하게 보였다가는 회사 생활이 고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약'해 보였다가는 공통 업무, 남들이 싫어하는 업무, 잡무를 떠안고 싫은 소리를 더 많이 들으며, 남의 부탁을 한 번이라도 더 들어주게 된다. 차갑고 강하고 개인적인 캐릭터로 분해서 철벽을 쌓을수록 남들의 터치는 줄이고 아쉬운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 한 마디로 회사 생활이 편해지는 것이다. 


이중 생활을 결심하게 된 것은 '강약약강'에 대한 포식자들 때문이었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사람들의 먹이사슬 맨 아래 '약자'로 고초를 당했던 경험치가 나름의 전략을 만들어 주었다. 약해 보이지 말자, 그들에게 틈을 주지 말자라고 결심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보다 냉정하게, 좀 더 강하게, 주장을 확실하게 나 만만한 사람 아냐, 함부로 대하지 마라는 사인을 보낸다. 건드려 봤자 피곤하겠군, 세게 나가 봤자 먹히지 않겠군이라는 판단이 들도록 괴롭히거나 일을 몰아주지 않도록 방어한다. 정에 약하고 감정적이고 거절을 잘 못하는 나이지만 일할 때만큼은 반대로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행동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면서 지금 당장 쥐어 짜라는 막말을 던지는 상사 앞에서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던 적이 있다. 원하는 방향 제시도 뚜렷하게 하지 않으면서 결과물만 내놓으라 하고, 인격적으로 깎아 내리는 행태가 여러 번 반복된 상황이었다. 이런 것도 못하냐고 무시하는 발언에 비아냥도 더해졌다. 처음에는 소통이 되지 않는 불합리한 상황에 존중받지 못해서 답답해서 울컥했는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쇼잉을 해 보자 싶었다. 너만 미친 놈이냐, 나도 미친 년이다 보여 주고 싶었던 억하심정도 있었다. 더 큰 목청으로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꼈고 상대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제야 일이 잘못 돌아가고 그 원인이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자기가 이렇게까지 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뭔가 문제냐, 어떻게 하면 되겠냐, 괜찮냐며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본때를 보여줘서 후련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면서 회사를 다녀야 하나 자괴감도 따라왔다. 동료들 보기가 부끄러웠고 그날의 대처가 최선이었을까 의문이 남았다. 나의 괴로움은 그날 이후 180도 달라진 상사의 태도로 해소되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업무 지시나 예의 없는 언행으로 공격하거나 건드리지 않았으며 아주 적절한 거리두기가 유지되었다. 강자에게 약자가 아닌 강자로 대처한 결과였다. 쟤는 미친 년이구나, 건드렸다가는 큰 일을 내겠구나 더러우니 피해가자 그런 계산이리라. 그 상사는 여전히 약자에게는 강자로 내게 했던 선 넘는 행동들을 하고 있다. 만만한 타깃을 정해서 선택적으로 괴롭히는 강약약강의 전형이다. 그분과 서먹하고 어색한 관계를 예상했다면 걱정 마시라. 어떤 틈도 주어선 안 되기 때문에 철판 열개쯤 깔고 아주 예의바르고 싹싹한 팀원 배역을 잘 해내고 있다. 일도 열심히 찾아서 하면서 말이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꽃을 머리에 꽂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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