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결혼했습니다!
<22. '사색'은 꼭 필요합니다!>
'요약과 발췌'는 제가 책을 읽으면서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만, 그러다 보니 어딜 가더라도 책은 반드시 휴대하지만 연필(샤프)과 메모지 역시 빠지질 않습니다. 줄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주제나 핵심으로 보이는 문장 혹은 용어 및 소재를 빠트릴 확률이 낮은 것은 필기도구를 사용하여 책 읽는 사이에 언제든지 필기하는 '초서 독서'의 힘입니다.
요약과 발췌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문장 혹은 단락을 읽으면서 갑자기 먹먹해지거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을 때는 잠시 읽는 행위를 멈추고 왜 그런 상황이 일어났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머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의 정체를 파악하거나 생각이 솟아나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곧 사색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이성의 운명에 대한 고백, 순수이성비판', 임마누엘 칸트 원저, 김상현 지음, 미래엔아이세움) 내용과 개념을 따라 숙고의 시간을 가지면 사고는 공허하지 않고 직관은 비판적 사고의 결과물이 될 것입니다. 책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지만 사색하지 않으면 지혜나 통찰로 가는 과정을 밟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사색을 위해서 책을 읽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끔은 사색 시간에 정신이 번쩍 들거나 찰나의 깨달음을 얻고, 오랜 시간 동안 잊었던 것을 이제야 생각했다는 그런 기분에 휩싸이면서 가벼운 쾌감도 느낍니다.
고요한 도서관이 아니어도 덜컹거리며 시끄러운 지하철이나 기차 안이든, 산만한 카페 내에서든 책 읽는 중간의 사색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나, 어릴 때 만화영화로 보았던 '이상한 나라의 폴'이 빨려 들어갔던 이상한 세계로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경험입니다. '와, 이런 내용이었구나!', '왜 이런 사실을 이제껏 몰랐지?', '헉, 이럴 수가!'...
사색(思索)은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지는 일입니다. 본문 내용에 자극을 받아 책 읽는 걸 멈추고 잠시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져봅니다. 순간적인 '돈오(頓悟, 갑자기 깨달음)'의 상태가 될 수도 있고, 미처 인식하지 못한 저자의 다른 뜻이나 좀 더 깊은 의미는 없는지 검토하면서 추론이나 비판적 사고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제 머릿속의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한 해당 글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저절로 내재화하는 과정이 일어납니다. 지식이나 정보 또는 이론이나 스토리텔링이 생각과 만나 내재화를 거쳐 또 다른 모습의 결과물로 뇌에 저장됩니다.
좋은 책을 읽을 때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책 읽는 중간에 저절로 사색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사색 시간이 늘어나게 하는 책일수록 훌륭한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책을 읽으며 추론이나 상상이 가지치기를 하면서 뻗어나가는 과정이 반복되어 생각하는 힘은 늘어나고 커지며 향상됩니다. 책을 정보와 지식 습득의 도구로만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훑어보거나 '발췌' 독서를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 특히 중고생들이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대부분의 책을 일부분만 발췌해서 읽은 후에 완독한 것처럼 학교생활기록부에 당당히 올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정보와 지식이나 이야기도 중요합니다만, 사색을 생략한 상태에서의 읽기라면 독서의 절대적인 가치인 정신적 성장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지식과 정보, 이야기의 습득과 사색의 균형은 온전한 독서의 힘과 가치를 드러내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