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결혼했습니다!
<23. 고전(古典)은 '고전(苦戰)' 중!, 신간은 '습격' 중!>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건 더 많아지는 것처럼, 책을 많이 읽으면 그만큼 읽어야 할 책은 더 많이 집니다. 책을 읽다가 본문에서 저자가 인용하거나 소개하는 책들은 좋은 책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책 중에 읽지 않은 책은 웬만하면 읽어야 할 도서 목록으로 저장합니다. 문제는 그런 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목록이 너무 많아진다는 것이지요. 기대에 부풀어 저장한 목록이 책 읽는 속도를 훨씬 앞서니, 목록이 점점 늘어나는 건 당연합니다. 가끔은 너무 비대해진 도서 목록을 좀 줄이기도 합니다만 늘 욕심이 앞서기에 늘어나는 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고전 읽기를 선호하는 탓에 독서 목록의 우선순위는 고전입니다. 수천 년 전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책을 고전으로 여기며 안 읽은 책들을 목록에 올립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정신을 갈고닦게 한 고전은 저 같은 독서가를 매료시키지만, 막상 읽으려면 배경지식의 부족이나 너무 많은 분량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읽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독서 목록에서 고전의 수는 잘 줄어들지 않습니다. 고전을 선호하면서도, 목록에 가득 채워놓고도 쉽게 읽지 못하는 게 고전이어서 역시 '고전(古典)'은 책과의 전투에서 '고전(苦戰)'하도록 만듭니다.
필독 도서 목록을 자꾸만 늘리게 하는 또 다른 주범은 바로 '신간'입니다. 공공 도서관이나 대학 및 언론 등에서 추천하는 신간을 포함시키고, 대형서점에서 제시하는 베스트셀러 중에서 내용이 가볍고 잠시 유행을 타는 대부분의 책을 제외하고 좋은 책도 선택합니다. 독서 목록의 순서대로 책을 읽고 있지만 중간을 파고드는 '신간' 때문에 기왕의 책이 밀리면서 목록은 계속 늘어납니다. 고전 중에서도 새로운 번역판이나 개정판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독서 목록에 기어이 포함시키고야 마니, 그야말로 '신간의 습격'이란 표현이 적당하겠습니다.
필독 도서 목록을 파고드는 신간들의 역습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대형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신간 코너를 보지 않고 외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독서 일정으로 읽어야 할 목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 책의 유혹에 자꾸 넘어가니, 계획된 독서 일정은 엉망이 되고 독서 목록은 자가증식을 하는 것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차분하고 냉철하게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고전의 위용과 신간의 산뜻한 모습을 물리치기는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김경집 씨의 책 '인문학자 김경집의 6I 사고 혁명'(김영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의 주인공은 히포크라테스다. 예술가가 아닌 의사다. 자기 제자들이 의술 수업을 마치고 본격적인 의사 생활을 시작할 때 했던 말이다. 인간의 신체는 너무나 신비롭고 복잡해서 그걸 다 배우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그 기술(arte)을 완전히 익히는 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러니 좀 배웠다고 우쭐대거나 과신하지 말고 환자를 대할 때 늘 겸손한 자세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했던 말이다('art'라는 말에는 '예술'과 '기술' 두 가지 뜻이 다 담겼다). 이 말이 예술의 영역에서 자주 쓰이면서 굳어졌다. 통용하면서 본디 뜻을 헤아릴 까닭이 없어지면서 엉뚱하게 쓰이는 경우다."
'인생은 짧고 좋은 책은 많아도 너무 많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책과 결혼한 제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독서에 대한 욕심과 부담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