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책을 선택했다>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도서관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열람실에 자리 잡는다. 가급적이면 늘 가는 자리에 앉지만 학생들 시험 기간에는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더 일찍 가서 문 열기 전에 줄을 서야 할 때도 있다. 책만 읽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 어머니 한 분 안 계시다고 이렇게 세상이 바뀌나. 모든 게 자율이고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이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는 게 전부 내 마음대로다. 아무도 이래라저래라 눈치를 주는 사람이 없다.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도 없지만 내가 걱정해야 할 사람도 없다. 어깨 위의 모든 짐이 사라진 상태다. 몸은 가볍지만 마음은 아직 무겁게 느껴진다. 이런 삶을 상상해 본 적 없으나 현실이 되었다.
점 하나에서 다시 시작된 삶이 점점 희미하게나마 형태가 갖추어지고, 그런 인상들이 하나씩 혹은 개체를 구별할 수 없게 살갗에 멍이 드는 것처럼 피어오르며 수없이 많은 관념 덩어리로 뭉쳐진다. 이런 삶도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하다. 삶의 다양성이 오감으로 느껴진다. 이제부터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아니, 무엇이 되고 싶은가. 여러 상념 속에 책 속의 글자들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인다. 독해 수준에 맞지 않은, 너무 어려운 책을 골라 읽는 바람에 읽기에 애를 먹기도 하고, 어떤 책은 술술 읽히기에 빠른 진도로 신이 났다. 어렵게 읽었던 쉽게 읽었던 완독의 뿌듯함에 나른한 쾌감이 말초신경을 타고 오른다. 종합자료실의 시큼한 곰팡이 냄새와 열람실에 모인 사람들의 특유의 체취마저 익숙해지니 내 집인 양 포근하고 편안하다.
삶에 정답이 없듯 독서에도 길이 없는 것처럼 읽고 싶은 걸 닥치는 대로 읽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하는 상식 같은 이론도 각 개인에 따라서는 모두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시대와 세대에 따라 진리나 진실의 모습은 변한다. 인공지능의 발달과 동영상의 대세 등극은 점점 책의 존재와 독서의 영역을 쪼그라들게 하면서 이제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는 정신적 유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삶의 유익뿐만 아니라 삶 그 자체를 하나의 사물처럼 바라보게 하면서 성찰을 유도한다. 삶의 벼랑에서 가까스로 버티다가 선택한 길에 살아갈 만한 이유를 전해주고 있다.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과연 책 속에 길이 있을까. 사람이 책을 만들지만 책이 사람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언제쯤이나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인정할 수 있고, 책으로 인하여 마음에 삶의 의지가 근육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을까.
하루 종일 책을 가까이하면서 제일 두드러진 변화는 독서의 재미에 푹 빠지면서 정신적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고, 도서관에 있을 때만은 별다른 걱정거리가 없어지고 유일한 피붙이였던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차츰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숙고하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해하는지, 무엇을 잘 못하는지 등을 떠올리며 나를 또는 자아를 알아간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과거에 대한 회한이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아픔이나 상처를 다독이고 위로해야 한다. 묵직하게 억누르는 죄책감을 덜어내지 못하면 앞날은 더욱 비참해질 뿐이다. 책을 읽으며 어떤 것은 반성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린다. 결국 무언가를 내려놓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머리 위를 맴도는 과거를 손으로 휘저어 쫓아버린다. 과거의 잘못은 어떡하든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틀어 쓴 뿌리를 내리려 한다. 무엇이든 부정적인 것은 내 머리에 앉지도 못하게 한다. 책이 사람을 만드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이 들뜨거나 조급하거나 불안하고 허황된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책을 읽기 때문에 평생 공부와 학습을 멈추지 않겠다는 학구적 의지와 자세가 나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다.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너무너무 많아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도, 독서가 일종의 삶의 쾌락으로 여겨진다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종류의 유희가 찾아온다면 아마도 그것과 독서를 병행할지는 몰라도 그 유희 때문에 책 읽기를 버리지는 않을 것 같다.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것처럼 이제는 독서를 바탕하지 않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허무와 권태'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배태되어 있다. 삶에서 허무와 권태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게 책 읽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정도면 책을 선택한 결과가 나쁘지 않다는 결론은 내릴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서 사고력이나 창의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해지고 발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박학다식하다는 말 역시 가끔 듣기는 했지만, 오히려 모르는 게 더 많아졌다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지식의 질은 만족하지 못하겠고, 아는 것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모르는 건 더 많아졌다. 그래서 더욱 책에 빠져 지식 탐구의 항해를 이어간다. 악순환이 아닌 선순환이라 생각한다. A4 용지 한 장을 펴놓고 지면 전체를 세상이라고 한다면 내가 아는 건 작은 동그라미로 그릴 수 있는데,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아는 게 많아져 그 동그라미가 조금 커졌다면 원주는 늘어났을 테고, 그 늘어난 원의 둘레와 접하는 부분은 모르는 영역이니 오히려 모르는 건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어느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훨씬 많다.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만족한다. 독서에 대한 수많은 명언들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독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거나 읽지 않거나 그것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밖에는 안 될 수도 있다. 그 차이가 결정적으로 작용할 때가 있을 수 있겠지만 독서가 아니라도 여행을 비롯해 삶을 유익하게 하는 도구는 많은 까닭이다. 동영상이 대세인 세상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겠다. 사회적 동물이고 종교적 동물인 인간에게 특징을 하나 더 추가한다면 호기심의 동물일 것이다. 만물을 아는 것만큼이나 나 자신을 아는 데에도 엄청난 삶의 동기부여가 생긴다. 세상을 알아도 나 자신을 모른다면 허전함을 떨치기 어렵다. 독서는 사색과 숙고의 시간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아는 문으로 들어가게 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한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에 쓰인 문구에 응답하는 과정이 책 읽기이길 바란다.
책이 제시하는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고 목적지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지만,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내 힘으로 가는 것이 의미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혼자 걸어도 고독하지만 외롭지는 않은(모순되는 말이긴 하다) 길이다. '고독'이라는 말이 외롭다는 의미가 배제된 뜻으로 쓰이거나, 고독과는 다른 단어가 존재했으면 좋겠다. 언제나 내 곁에 있으면서 삶의 위로와 힘을 선물하는 책은 영원한 동반자이다. 돈을 벌지 못하고 명예도 얻는 것이 없는데도 책을 선택하고 관계를 유지한다.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 우울하고 짜증이 날 때도, 풍요롭고 여유 만만한 생활환경이 아니어도 내 곁에는 언제나 책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큰 위로가 된다. 나의 진정한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는 과정이길 바란다. 사람이 만든 책으로 삶을 지탱한다. 사람이 되든 안 되든 책에 의지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럴 수 있을까. 생활이 안 되는 데도 그럴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책만 읽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