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책을 선택했다>
사람이 만든 책이 다시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든다 해도 그 사람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까? 책만 읽고 먹고살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노숙자가 돼도 괜찮다는 호기를 부리는 순간을 떠올리게 해 갈등이 이어졌고, 책이나 독서와의 관련은커녕 인문 분야를 전공하지도 않은 공대 출신인 까닭에 막연한 두려움은 주변의 공기처럼 나를 감쌌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책과 담을 쌓고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늘 손에 책을 들고 산 정도는 아니었기에 마음이 심란했다. 하지만 삶에 대한 거의 모든 걸 내려놓은 당시에는 사실 큰 용기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유일한 선택지였다. 도서관에 있는 그 많은 책들 중에서 고전 같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제목의 책부터 꺼내 들기 시작했다. 책의 보관 상태와 파손 여부를 검토한 후 차례와 머리말과 더불어 본문을 대충 훑어보고 읽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책을 들고 열람실로 향했다.
'세상은 넓고 좋은 책은 많다.' 한정된 시간 내에 그 많은 좋은 책 중 손에 쥐는 책은 그야말로 극소수인 까닭에, 바둑을 둘 때에 한 수 한 수 최선을 다해 두는 것처럼 책을 고를 때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명저라 알려진 책을 다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친 욕심이기도 했기에 눈에 띄는 순서대로 훌륭해 보이는 책을 골라 읽었다. 나의 관심사나 취향이라 할 게 없었다.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알려진 책은 가리지 않고 읽고 싶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많아 읽기 어려운 책도 있었지만 분량의 적고 많음은 따지지 않았다. 독해의 어려움은 '문지방 효과' 또는 '문턱 효과'라고도 불리는 진입장벽처럼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과 곤란을 겪었지만, 같은 제목이라도 출판사에 따라 난도가 조금 낮은 책을 읽거나 해당 책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한 책을 골라 읽은 후에 다시 도전하는 방식으로 어려운 책도 공략해 나가기 시작했다. '재미없는 책은 있지만 어려워서 못 읽을 책은 없다'라는 심정으로 세상의 모든 책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장르와 난도에 관계없이 활자를 읽어나가는 습관이 몸에 익자 어느덧 책 선택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책과 가까이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철학이나 과학 분야 중 독해 수준이 높은 책은 비슷한 종류의 독해 난도가 낮은 책을 거쳐 도전했고, 엄청난 분량의 '벽돌 책'이거나 대하소설 같은 시리즈물도 시간과의 싸움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끈기를 갖고 읽어나갔다. 한글로 된 최고 난도라 불리는 책에도 겁을 상실한 채 달려들었다. 얼마나 제대로 이해를 했느냐는 나중 문제였다. 완독을 목표로 하여 끈기를 발휘하니 읽는 중의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성취감과 뿌듯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입문집, 해설서, 평론집은 어려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의 효과가 이런 것이 아닌가.
한글로 된 세상의 모든 책은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니 이제는 정말 '책벌레'가 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책이 정신적 유희의 도구라고, 일반교양서적으로 '번역된 책 중에 못 읽을 책은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골라 읽었다. 읽을 책 선택은 오로지 읽는 목적과 취향의 문제로만 결정했다. 철학이니 사상이니, 수학이니 물리학이니 하는, 아무리 일반교양 수준의 책이라도 학문의 깊이는 장난이 아닌 책이 있었지만 차곡차곡 쌓아가는 독서 이력은 충분한 자양분이 되었다. 같은 분야의 비슷한 난도를 가진 여러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다 보니 어렵게만 느껴졌던 용어나 내용들이 저절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면 초등학교 때에는 어려웠던 분수 계산이 쉬워지는 것처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는 것처럼 반복해서 읽고 난이도를 조절해 가며 읽으니 읽기에 대한 자존감이나 자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책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니 어떤 분야든 관심이 가는 대로 내 취향에 맞게 깊이 있는 책도 읽을 수 있었다. 공부라는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정신적인 또는 지적 만족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 읽는다고 생각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은 '어떤 분야에서 책 한두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라는 독서 관련 속어와 닮은 점이 있어, 선무당이 되지 않으려고 낮은 자세와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책 읽기를 통해 얻는 지식과 앎이 상상력과 지혜의 발현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책 읽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믿어보기로 했고, 독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독서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꾸준히 정신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고 싶었다.
'누구나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는 온다'라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독서 습관이 오랜 세월 동안의 직장 생활에도 근근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독서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기를 만나 그동안의 움츠리고 잠재되었던 만큼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순간을 맞기를 바랐다.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인생에서의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적 절망과 방황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선택한 책 읽기라는 행위가 쌓이고 쌓이니 하나의 정신적 아카이브가 되었고, 그 아카이브의 규모와 질은 점점 성장하고 있고 밀도는 높아지리라 믿었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두꺼운 분량의 책을 만나면 더욱 몸의 힘을 빼고 시간 여유를 가지면서 읽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다면 같은 분야의 좀 더 쉬운 책으로 난도를 낮추어 읽고 난 후에, 어려웠던 책에 다시 도전했다. 범접할 수 없는 난도의 책이 나타나면 필요한 내공을 꾸준히 쌓아서 후일을 기약했다. 재도전한 책이 읽을 만하다고 느꼈을 때는 짜릿한 쾌감이 밀려왔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주위에 도서관이 없어서 그랬는지 시험 기간에는 자주 남산에 있는 도서관을 가곤 했다. 새벽부터 줄을 서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었고, 문이 열리기 전의 문 앞에는 학생들의 가방이 일렬로 줄을 선 모습이 장관이었다. 아주 저렴한 입장료가 있었고 점심에는 도서관 내에서 파는 라면이나 가락국수 국물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지금은 주위에 작은도서관을 포함하여 시립이나 구립 도서관이 꽤 많이 있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야말로 천국 같은 장소를 제공하는 도서관이다. 신간도 잘 들어오고 서고에는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절판됐지만 훌륭한 책들이 무수히 많다. 한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는 조직화된 기구 중에 도서관만큼 좋은 것은 없을 듯하다. 그렇게 좋은 곳이 시험 기간 외에는 사람들마저 북적이지도 않는다. 한적하고 고요하다시피 한 도서관, 정적이 흐르는 도서관에는 속세의 모든 찌꺼기들을 걸러내고 삶의 주름을 펴는 시간이 머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