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책을 선택했다>
내가 서평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읽은 책의 내용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뭔가 의미 있고 생산적인 독후 활동을 위해서, 글쓰기 능력을 키워 책을 내기 위해서, 독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등 다양한 목적 때문이었다. 서평을 잘 쓰려면 책을 읽으면서 적당한 요약과 발췌가 필요했다. 읽는 책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할 때에는 요약과 발췌의 양이 늘어났다. '초서(抄書)'는 책을 읽다가 핵심이 되는 구절이나 마음을 울리는 글을 만날 때 옮겨 적는 것을 말하며, '질서(疾書)'는 중국 송나라 학자 장재가 공부하다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빨리 기록했다는 말과 더불어 주자의 '장횡거화상찬'의 '묘계질서'에서 따온 말로, 책을 읽다 묘하게 와닿는 생각이 떠오르면 잊지 않기 위해 빨리 적어둔다는 뜻이다.
두 말은 의미가 비슷하지만 초서는 책의 요약이나 발췌를, 질서는 책 내용과 유사한 내용 혹은 그로 인한 발전된 생각의 정리라고 보면 되는데, 초서와 질서는 내가 책을 읽을 때 항상 병행하는 독서 방법이다. 초서와 질서는 책을 읽는 도중에 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읽기 전이나 다 읽은 후에 한다면 별 효과가 없고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독서와 함께 그 둘을 함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읽은 책의 내용을 될 수 있으면 잊지 않고 내재화를 하기 위함이다. 책에서 얻은 지식이나 지혜를 잠재의식 속에 깊이 잠기게 하거나 휘발되는 것을 방지하여 꽉 붙들어두는 것이고, 읽은 내용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때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책을 읽을 때 병행하는 초서와 질서에 필요한 나의 '문방사우(文房四友)'는 독서 노트(스프링 달린 공책)와 이면지(A4 사이즈 두 번 접은) 및 연필(샤프)과 지우개다. 도서관이나 집에서 책을 읽을 때에는 독서 노트를 펼쳐놓고 초서와 질서를 해가면서 책을 읽고, 이동 중의 전철이나 기차 안 혹은 공책을 꺼내놓기 불편한 기타 장소에서는 접은 이면지를 독서 노트 대신 사용하면서 책을 읽는다. 이면지에 적은 내용은 다시 독서 노트에 옮겨 적거나 내용이 너무 많은 경우에는 가위로 오려서 독서 노트에 풀로 붙인다. 도서관에서는 '문방사우'에 독서대를 추가하고 집에서는 그 외 독서등을 추가한다.
초서와 질서의 가장 큰 장점은 웬만한 책은 한 번만 읽어도 된다는 점이다. 대개의 독서 전문가들은 좋은 책은 여러 번 읽기를 권하지만, 나는 워낙 다양한 분야의 많은 책을 읽고 싶기 때문에 좋은 책이라도 무조건 반복해서 읽지는 않는다. 내가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책은 따로 있는데, 좋아하는 고전 중에서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거나 개정판이 나온 경우에는 몇 년 주기로 다시 읽는다. '사서삼경'이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책들이 반복해서 읽은 대표적인 경우다.
읽은 책의 핵심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고 나만의 독특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초서와 질서의 두 번째 장점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읽은 책의 내용이 가물가물해도 독서 노트를 펴 그 책에 대해 적은 내용을 보면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초서와 질서를 바탕한 독서 노트를 치밀하고 상세하게 작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마치 옛 일기를 꺼내 읽어보는 것처럼, 책의 내용과 당시의 느낌이 현재로 소환되면서, 때로는 어떻게 내가 이런 내용을 적을 수가 있었을까 하는 기특함이나 대견함 같은 것이 느껴질 때도 있다. 여러모로 초서와 질서는 독서의 가치를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책 읽는 중의 활동이다.
2천여 권의 책을 읽고 초서와 질서를 바탕하여 쓴 분야별로 구분한 독서 노트는 이제 80여 권(200여 쪽 분량) 정도인데, 한눈에 봐도 일정한 기록의 패턴이 보인다. 책 내용에 대한 요약과 발췌는 제목과 저자, 출판사, 발간일, 저자 프로필, 줄거리, 명문장, 감상평 등을 고루 갖춘 책의 핵심을 말해주면서, 차곡차곡 쌓인 하나의 아카이브 형태를 취한다. 서평을 쓸 때뿐만 아니라 강연이나 상담 시에 참고하는 독서 노트는 나의 귀한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독서 노트에 담긴 정보를 보면서 2차 보관 장소인 블로그에 온전한 문장으로 서평을 쓴다. 초서와 질서의 결과물인 요약과 발췌 및 감상평을 바탕으로 적은 내용을 서술형으로 고쳐 완전한 문장으로 블로그에 옮겨 적는다. 블로그에 옮겨 적을 때 독서 노트에 적은 내용을 보면서 책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읽은 책에 대한 내용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반복한다. 책 읽기는 초서와 질서로 인한 요약과 발췌를 낳고, 요약과 발췌에 감상평을 실어 다시 온전한 형태의 서평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초서와 질서는 독서의 가치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소중한 방법이다.
'벽돌책'이라 불리는 책 읽기는 대나무의 굵은 마디 같았다. 독서가로 가는 길에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했다. 유명한 책이지만 분량이 적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읽고 싶은 욕망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