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두꺼운 책 읽기 전략과 그 치열한 과정

<어느 날 책을 선택했다>

by 나승철

책을 선택하면서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교과서에 나오는 고전이나 명저 등이었다. 그런 책들은 대개 두꺼운 경우가 많았다. 누구나 들으면 다 아는 책이지만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고 분량도 많아 잘 읽지 않은 책, 그런 책을 될 수 있으면 읽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들과는 다르게 돋보이면서 이런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고 내세울 만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지적 허영심은 그림자처럼 늘 나를 떠나지 않았다. 지적 호기심이 충분하고 관심 분야이며 독해 수준까지 맞는 책이라면 얼마든지 분량이 많아도 끝까지 읽을 수 있지만, 500쪽이 넘거나 1,000쪽을 넘나드는 책들은 끝까지 읽기 어렵다. 대하소설이나 몇 권이 한 세트인 책은 훨씬 읽기 힘들 때가 많다. 지적 허영심을 바탕한다 하더라도 보통의 책 읽기 상황과는 무척이나 다른 상당한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책 읽기에는 어떤 읽기 방법이 도움을 되었을까?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읽어야 할 책들을 지적 호기심이나 관심사 등을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여러 단계로 나누어진 역삼각형 모양이 연상되는데, 호기심이나 관심이 최고인 사다리의 맨 꼭대기 층에 속하는 책들은 분량이 많아도 그나마 힘을 덜 들이며 읽어낼 수 있지만, 호기심과 관심 분야가 아니면서도 필요한 지식 습득을 위해 읽어야 할 책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분량이 많다면 끝까지 읽는 데에 엄청난 수고를 들여야 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과정에서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 서평이 중고등학생과 그들의 학부모에게 도움이 된다며 학교에서 강연 신청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학생들에게 제대로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학생들의 교과서 뒤에 기록된 교과서 저자들이 참고한 '참고문헌' 목록의 책들을 본격적으로 찾아 읽었다. 참고문헌이 많지 않은 수학이나 자연과학 도서는 각 교과별로 과학 관련 단체나 학회에서 추천하는 책들을 독서 목록에 올렸다. 그렇게 정한 인문, 자연 필독 도서 목록에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어도 읽어야 할 책들도 쌓이기 시작했고, 관심사도 아니며 분량도 많은 책 읽기에 대한 별도의 전략이 필요했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각 교과의 책 중에서 학생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책은 대부분 고전이고 명저로 알려진 책이다. 학생들을 위한 독서가 보편적인 일반 성인들 독서와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다행히 중고등학생들에게 필요한 책 종류는 학문의 폭이 넓을 뿐이지 대개는 교양 도서 수준이어서 내가 읽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려면 교양 수준을 넘어 심화된 내용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두껍거나 세트로 구성된 책도 읽어야 했다.


두꺼운 책을 읽을 때는 '무작정 읽으면 된다'라는 생각보다는 반드시 완독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다가올 파고의 높낮이를 예측하면서 읽기에 돌입하고, 읽는 중에 몇 가지 전략을 세워 실행하면 조금 더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처음은 쉽게 읽힌다. 책을 선택한 동기와 목적, 또는 기대가 아직 식지 않을 때이고, 도입부인 까닭에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한 십 분의 일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후로 넘어갈 때부터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하고 남은 분량의 무게가 서서히 압박으로 다가온다. '이걸 언제 다 읽지?' 하는 마음과 함께 포기하라는 유혹까지 밀려든다.


완독으로 가는 길의 초반부터 어려운 고비가 찾아온다. 좀처럼 읽은 분량은 불어나지 않고 정체된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장 수 가운데 한 장 한 장 넘기는 탓에 분량에는 전혀 표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절망하게 한다. 장거리를 뛰는 것처럼, 마라톤을 달리는 것처럼 순간순간 포기의 그림자가 책장 위를 덮친다. 그래도 선택한 책의 가치 때문에, 악착같이 행간에 구멍이 나도록 글자를 따라간다. 초반의 이런 고비를 넘겨야 중반에 다다른다. 극강의 인내의 시간은 책의 절반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다가, 드디어 절반을 넘어서부터는 새로운 희망이 싹트기 시작한다. 조금만 힘을 내면 끝까지 읽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부풀어 오르고, 여기서 멈추면 읽은 게 아깝다는 생각 때문에 초반에 자주 들었던 포기라는 생각은 잊게 되고 진도 나가기에 박차를 가한다.


절반 이후의 책 읽기의 속도는 확실히 절반 이전보다 빠르다. 저자의 문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낯선 용어들이 반복되면서 이해도 빨라진다. 넘어간 책장의 분량을 보면서 뿌듯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지속되는 것도 속도를 내는데 영향을 준다. 읽은 분량과 남은 분량을 수시로 비교해 보면서 힘을 더 내본다. 이제 조금만 더 인내를 발휘하면 마침내 이 두꺼운 책을 완독 할 수 있다는 뿌듯한 성취감이 신기루처럼 아른거린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는 관념적 문장까지 곱씹으며, 남들에게 이렇게 두꺼운 책도 읽었다고 뽐내는 상상을 하면서 흐뭇해한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러나, 마지막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거의 다 끝났다고 생각한 읽기 여정이 여간해서 마지막 장에 이르지 못한다. 대단원을 장식하기에는 책의 분량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끝날 듯, 끝날 듯한 상태에서 책장을 넘겨보지만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의 끈기를 정신에서 짜내기 시작한다. 이제는 뿌듯함이나 성취감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냥 한 장 한 장 넘기는 데에 집중한다. 결론으로 달리는 저자의 주장에 웬 사족이 그렇게 많은지 원망을 토한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내용이 너무 많아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며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쓴다. 기어코 마지막 장에 다다른다. 비로소 완전히 해냈다는 성취감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마지막 부분의 집중은 독서 중 최고의 몰입 시간이다. 올림픽 마라톤 게임에서 스타디움으로 들어오는 첫 번째 선수가 두 시간 이상 뛰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힘을 내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드디어 대견하게도 그 두꺼운 '벽돌책'을 돌파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두꺼운 책을 읽을 때 나처럼 비슷한 경험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동안 책을 많이 읽어왔지만 두꺼운 책 읽는 방법에 대해서는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아직 '진정한' 독서가가 되지 못하여 두꺼운 책을 읽느라 쩔쩔매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방법이 효율적이거나 탁월한 방법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 오래전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되어 도심에서 운전을 하려니 너무 정신이 없고 두려웠다. 그러다가 고속도로를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무려 부산까지 다녀온 적이 있었다. 운전대가 뽑히는 착각에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긴장을 하면서 어찌어찌하여 왕복에 성공했다. 그런데 그 후 놀라운 일이 생겼다. 도심에서의 운전이 예전 같지 않게 너무나도 수월해진 것이다. '벽돌책' 같은 두꺼운 책 읽기를 내가 오래전에 경험한 고속도로 주행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반 단행본 읽기가 너무 수월해진 것이다. 세상 그 어떤 좋은 책과의 조우를 기다린다. 아무 두려움 없이!


두꺼운 책 읽기에 이어 한글로 번역된 외국 서적을 읽기에도 특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번역자와 출판사의 잔꾀(?)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말이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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