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책을 선택했다>
대한민국에도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지만 세계로 넓혀 보면 그 수는 어마어마하다. 뛰어난 외국 책의 한글 번역본을 읽고 있노라면 그 탁월한 문장과 글 구성에, 한글로 써도 이보다 더 잘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범접할 수 없는 문학적 향기를 내뿜는 한글 번역 책을 볼 때에는 기가 막힌다. 자연과학을 배우면서도 글쓰기 실력을 꾸준히 연마했기에 가능한 일이겠다. 다른 나라의 책을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출판된 책은 몇 가지 사항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원전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글로 번역된 책이 최대한 원전과 다름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원전의 제목이고, 둘째는 'Copyright'(판권) 연도, 셋째는 원전을 온전한 분량 그대로 번역했는지의 여부, 넷째는 고전일 경우 어떤 판본을 번역했는지의 확인, 마지막은 번역의 질 검토이다.
시중에 나온 많은 번역본들은 출판사들이 원전의 제목 그대로 쓰기보다는 한국 시장에서 어울릴 만한, 마케팅에 좀 더 도움이 될 만한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아무 생각 없이 한글 번역본의 제목만으로 책을 읽었다가 나중에 원전 제목이 한글 제목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당황할 수 있다. 번역본 출판사의 과욕으로 인해 의미가 전혀 다른 한글 제목이 붙었을 때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한글 제목이 본문 내용과 맞지 않다는 사실에 배신감이 들었던 때도 있었다.
대표적인 제목 논란의 중심에 있는 책이 '죽은 시인의 사회'이다. 이 책은 영화로 너무나도 유명한 덕분에 학생들이 많이 찾는다. 원제는 'Dead Poets Society'다. 한글 제목에서의 '사회'는 원제의 'Society'를 가리킨다. 책이나 영화 내용으로 보면 '사회'보다는 '협회' 또는 '모임', '동아리'가 어울린다. 번역자가 선택한 '사회'는 다른 단어보다 어감도 좋고 부르기도 좋다. 다만, 고등학생들의 학교생활 이야기에 뜬금없이 '사회'가 나온다는 점이 의아할 뿐인데, 그런 점을 감안하면 아주 잘못된 번역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2011년 원작이며 2012년에 나온 책,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아비지트 배너지 외, 이순희 옮김, 생각연구소)라는 책의 원제는 'POOR ECONOMICS'다. 한글 제목과 원제가 많이 다르다. 책을 읽어보니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라는 내용은 거의 없다. 왜 최빈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빈곤하게 살며, 어떡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한 명쾌한 분석이 대부분이다.
'Copyright'(판권)의 연도는 원전이 출간된 연도를 알려주는데, 최근에 번역된 책이라 하더라도 판권의 연도는 오래될 수도 있으며, 그렇다면 책을 읽으면서 원전이 완성된 당시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비교 검토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간혹 원전의 발간 연도보다 글의 내용에서 나타나는 연도가 나중일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판권의 연도가 잘못 기재된 것이다. 2014년 원작이고 2017년에 나온 '국가의 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짜우포충, 남혜선 옮김, 더퀘스트)를 읽고 난 후에는 판권 연도가 이상하여 출판사에 문의를 했다. 담당 편집자의 답이, 책의 원전은 2014년 '우산 혁명' 전에 나왔지만 한글 번역판은 2015년 개정판을 번역해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판권 표시와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출판사가 번역본을 출간할 때에는 판권 표시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번역본에는 저자가 쓴 언어를 직접 한글로 번역한 '원전 번역'과 그렇지 않은 '중역'이 있는데, 후자는 저자의 언어로 된 글을 영어나 일본어 또는 중국어 같은 언어로 번역된 글을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경우다. '원전 번역'이나 '중역' 외에도 전체를 번역한 글과는 달리 일부만을 번역한 '편역'도 존재한다. 두꺼운 원전의 일부 내용을 덜어내고 특별한 목적에 맞게 편집한 것이다. 예전보다는 훨씬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영어나 일본어로 '중역'된 책을 한글로 다시 번역한 책이 많은 것은 영어와 일본어 번역 가능자가 많아서 그렇거나, 번역 비용을 줄이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백 년 혹은 수백 년, 수천 년 지난 고전인 경우에는 번역자가 번역 대상으로 선정한 최근의 원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신화를 번역할 때에 원전 번역이라 하더라도 저자가 번역 대상으로 삼은 책은 수천 년 전에 지어진 책이 아닌 최근의 같은 언어로 된 책이다. 신뢰할 만한 출판사라면 번역자가 어떤 원전을 선정해서 번역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책의 앞이나 뒤에 기재를 해놓지만, 그렇지 않고 어떤 책을 대상으로 번역했는지 전혀 기재하지 않는 출판사도 많다. 번역 대상물에 대한 정보가 없는 책은 거르는 게 좋다.
마지막으로는 번역의 질을 살펴봐야 한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번역이 잘 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읽다 보면 교정이 부족하여 오탈자가 많다거나 띄어쓰기가 잘못되었다는 정도를 확인할 뿐이다. 2020년 당시, 고전으로 유명한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1, 2(임효선 외 옮김, 한길사)를 읽을 때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1835년과 1840년에 출간된 원전은 1831년에 뉴욕에 도착한 프랑스인 토크빌이 여러 주를 탐사한 후 1832년, 프랑스로 귀국하여 저술한 책으로, 정치사회학을 바탕으로 미국 민주주의 정치제도와 사회체제를 치밀하게 분석한 명저로 불린다. 1997년 7월에 나온 번역본은 아직도 개정판이 아닌 채로 쇄를 거듭하여 나온 때문인지 여기저기의 오류가 책 읽기를 방해할 정도로 심했다. 조사의 오류 등 단순한 오타는 물론이고 직역과 의역의 모호함, 낯선 용어 사용, 인칭대명사의 혼동, 비문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오류투성이였다. 개정판이 나오면 반드시 다시 읽을 책 목록에 올린 책일 정도로 훌륭한 책인데, 아직도 개정판 소식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2018년 원작이며 원제는 'NATURAL BORN LEARNERS'인 '앞서가는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는가'(알렉스 비어드, 신동숙 옮김, 아날로그, 초판 1쇄, 2019년 10월 출간)를 읽을 때였다. 본문 내용 중에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에 관한 내용이 이상하여 출판사에 문의했더니,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번역자의 실수'였다는 담당자의 전언이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수정하여 새로 발간된 '초판 7쇄'를 보내왔다. 해당 내용이 1쇄와는 전혀 달라진 건 당연했다.
위와 같은 내용을 꼼꼼히 살피는 이유는 얼마나 번역자와 출판사가 번역을 하면서 정성을 들였는지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전의 제목과 한글 번역본의 제목의 차이, 원전 번역인지 중역인지 혹은 편역인지, 원전은 정확하게 언제 출간되었으며 어떤 저작물을 대상으로 번역했는지를 정확하게 검토하는 것은 좋은 번역본을 읽기 위한 필수적인 판단 요소이다.
독서와 관련한 강연 요청 때문에 기초적인 생활비는 그럭저럭 마련할 수 있었지만 예상하지도 못한 거대한 폭풍이 몰려와 수입이 갑자기 정지된 듯했다. 코로나19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