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지적 허세

<어느 날 책을 선택했다>

by 나승철

책을 선택한 후의 일상생활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직장을 그만두고 하루의 대부분을 책과 보내기 때문이다. 책을 읽든 서평을 쓰든 도서관과 서점을 가든 거의 모든 일과가 책과 관련된다. 책에 빠지다 보면 배꼽시계가 매일 비슷한 시간에 울린다. 운동이나 사무적인 일 또는 노동을 하면서 몸을 쓴 것도 아닌데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 독서는 뇌를 많이 쓰는 일이 맞는가 보다. 몸에서 뇌가 차지하는 비중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뇌는 사용한다. 도서관의 한적하지만 경건한 분위기에 휩쓸리며 책에 몰두하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그렇게 십수 년을 보냈다.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우치다 다쓰루의 책이 있다. 도서관은 북적북적하면 안 된단다. 그의 말이 맞자. 중고등학생들의 시험기간이면 도서관은 '도떼기 시장'이 된다. 열람실에 학생들이 꽉 차기 때문이다. 그때만을 피하면 도서관은 대개 정적에 휩싸인다. 도서관에 들어가면서부터 마음이 차분해지는 이유다.


교양과 지식이 풍성해지면서 지식인 혹은 지성인이 된 것처럼 우쭐해지기까지 했다. 지적 유희에 빠지다 보니 지적 허세라는 결과로 수렴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모르는 건 더 많아졌다. 아무리 지적 허세에 휘둘린다 해도 모르는 것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책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평생 배우는 삶을 살기 위해서다. 인지부조화인가, 배우는 삶의 기본인 겸손을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다. 선무당이 사람 잡거나, 늦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나는 선무당이거나 늦 배운 도둑이다), 지적 허세는 호주머니 안의 못처럼 자주 삐져나오려고 한다. 양가적 감정이 삶을 지배한다. 지적 허세냐 겸손이냐, 그 둘 사이를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고전이나 명저로 불리는 책은 물론 좋은 책이라 생각되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특히 모든 과목에 걸쳐 중고등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주로 읽다 보니 교양과 상식이 풍부해졌다. 깊지는 않아도 세상 모든 지식에 두루두루 접근하면서 얕지만 넓은 지식의 저변을 확보했다. 책에 나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식이 이어져 고구마 줄기처럼 다양한 지식이 매달린 덩굴째 수확할 수 있었다. 책 본문에 나오는 여러 사례나 전문 용어 등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출처와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 읽는 속도가 이전보다 약간이나마 빨라진 건 당연하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책 읽기는 전혀 쓸모없는 지식이란 없다는 걸 깨닫게 하고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연결되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분명히 크다는 걸 실감한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대화를 하거나 토론을 하면 선뜻 나서지 못하고 내 의견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던 습관이 사라졌다. 어떤 주제나 소재가 주어져도 책을 통해 내재화시킨 지식이나 정보 덕에 대화와 토론에서 언제든 내 의견을 표출하고 의문이 들 때는 주저 없이 질문하는 습관이 들었다. 다만, 표현과 질문이 지나쳐 대화와 토론 분위기를 깨트릴 수 있다는 점은 늘 의식하면서 대화와 토론에 응한다. 너무 잘난척하는 모습을 보이면 온전한 대화와 토론이 진행될 수 없는 까닭이다. 독서를 통한 교양과 상식의 풍성함은 잘못된 정보나 지식의 오류를 밝혀내고 바로잡는 역할도 가능하게 했다. TV나 유튜브 동영상은 물론 책에도 잘못된 지식과 정보는 의외로 많다.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면서 내게 부탁한 출간 전, 출간 후 서평 문의에서 여러 차례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책 좀 읽었다고 지식 자랑은 여러 곳에서 이어졌다. 학교나 학원 또는 독서 모임에서의 강연 요청에 응했고, 독서 관련한 밴드를 만들어 개인 상담을 진행했다. 블로그에 올린 서평을 보고는 한 출판사에서 제안을 해 공저로 책('세기의 책: 문학 편 1', 디페랑스, 2022년 5월 출간)을 내기도 했다. 이러다가 유명 인사가 되겠다는 꿈은 허망하게도 코로나19를 만나 무산되었지만, 아직 독서에 관한 내공이 부족했다는 점이 더 큰 이유일지 모른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 글솜씨가 부족하고 강연 내용도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평은 그런대로 쓸 수 있지만 독창적 의견이나 날카로운 비평 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강연 역시 연속으로 이어지는 강의가 아닌 단 한 번의 강연이라면 주제에 대한 임팩트가 강력해야 한다. 열린 결말로 여운을 남기기보다는 확신과 감탄을 이끌어내어 청중에게 심경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 면에서 부족했다. 지적 허세만 부릴 줄 알았지 독자나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블로그 서평을 보고 출판사에서 서평을 요청하는 경우가 잦아 무료로 보내온 책들이 많았지만, 읽고 난 후에는 지인들에게 모두 선물로 나눠주었다. 도서관을 주로 이용하는 이유와 더불어 집에 번듯한 책장이 없어서 책은 소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집이 좁기도 하고 책 살 돈 역시 넉넉지 않은 탓이다. 독서가에게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 즐비한 거실이나 방이 없다는 건 좀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바라만 봐도 뿌듯함을 주는 책이 꽉 들어찬 책장은 지적 허세의 마중물이기도 하고 책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친구나 지인이 방문했을 때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과 방을 보여주는 것도 꽤 자랑스러운 일일 것이다. 정원 딸린 독채나 평수 넓은 아파트에 사는 모습이 부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거실이나 방에 책이 별로 없다면 부러움은 사라진다. 내가 읽은 책으로 가득 찬 책장들의 사열을 받으며 늘 함께한다면 얼마나 자존감이 올라갈까. 지인들이 와서 내가 읽은 책들을 보며 나의 지성을, 취향을, 학문적 깊이를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한마디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이런 사람이오!'라고 무언의 과시를 마음껏 부릴 수 있다니! 지적 허세의 절정이겠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책을 골라 사서 읽으면 좋겠다. 도서관도 이용하면서 읽고 싶은 책 중에서 소장하고픈 책은 꼭 사고 싶다. 독서 일지가 나만의 보물이고 블로그가 나만의 '서평 아카이브'라면, 책이 꽉 찬 책장으로 둘러싸인 거실이나 방은 나만의 '지적 허세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읽은 책은 정신에도 책장에도 존재하게 한다. 그런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책 세상으로 들어간다. 현실과 상상에서 모두 존재하는 지적 허세를 위해서.

수, 일 연재
이전 12화12. 어려운 책은 이렇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