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책을 위해 TV를 포기하다.

<어느 날 책을 선택했다>

by 나승철

10여 년 전에 중소기업에서 나온 TV를 샀다. 55인치 대형임에도 불구하고 LG나 삼성 TV에 비해 반값조차 되지 않았다. 이제는 TV를 틀면 화면이 나오지 않고 음성만 들린다. 싼 게 비지떡임이 드러났다. 대형 TV가 라디오처럼 된 탓에 뉴스가 나오는 시간에만 TV를 틀었다. 그동안 자의 반 타의 반 '독서가'로 자처하던 주제에 TV를 가끔이라도 본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뉴스는 자주, 스포츠 중계는 가끔, 드라마는 아예 보지 않았지만, 식사 시간만큼은 채널을 이리저리 탐색하며 반드시 TV를 시청했다. 소리만 나는 TV를 핑계로 이제는 어떤 결단이 필요했다. TV를 자주 대하면 책에 대한 친밀도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TV를 본 후 책을 읽으면 일종의 예열 시간이 필요했다. 책장 속에서 영상 잔상이 어렴풋이나마 나타난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잔상은 사라진다. 가끔은 머리를 식히려는 의도로 TV를 보았지만 머리는 오히려 가열되었다. 독서에 비치는 TV의 악영향을 모르지 않았지만 생각 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달콤한 TV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생각이 여물었다면 행동이 이어져야 한다.


요즘은 식사 시간에도 TV를 틀지 않는다. 오로지 먹는 데에만 집중한다. 아침에는 샌드위치와 우유, 점심에는 고구마와 견과류와 과일, 저녁에는 몇 가지 반찬과 함께 각종 잡곡을 섞은, 만든 곳도 보관하는 곳도 동일한 전기밥솥에서 한 공기 야무지게 담아 먹는다. 식사를 하면서 TV를 주로 보았고 아주 가끔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듣기도 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보고 듣지 않고 먹기만 한다. TV를 내 생활에서 없애버리기로 했다. 영어 청취를 위해 보던 CNN도 덩달아 끊어진 셈이다. 영어 공부는 따로 하자. 웬만하면 내 사전엔 멀티태스킹이란 없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동안 뭔가에 정신을 빼앗긴 채 식사를 했지만 이제는 먹는 음식 자체에 집중한다. 밥을 먹을 때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던 음식 종류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입안에 들어온 음식 씹히는 소리가 종류별로 다르다. 입만이 아니라 눈으로, 귀로 음식을 먹는다. 언제 이런 분위기를 느껴본 적이 있던가. 적막한 가운데 뭔가를 젓가락으로 집고 입에 넣고 씹는 소리만 들린다. 가끔은 숟가락이나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도 들린다. 음식이 입안에서 잘게 부서져 목을 타고 위장까지 내려가는 과정이 보이고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각 음식 고유의 색깔과 현재 상태의 질감이나 식감을 감상하면서 고요한 식사 시간이 흐른다. 이 나물은 어디서 왔을까. 이 아몬드는 태평양을 건너왔을까. 이 달걀은 어느 어미 닭이 낳았을까.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 떠오른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음식물이 나에게 스며들며 나와 동화된다. 먹고 마시는 결과물이 곧 나다. TV를 버리니 나의 일부를 되찾았다.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게 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혼자 먹는 까닭이다. 대화를 하며 즐겁게 식사를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혼자의 시공간 안에서 음식과 일대일 대면하며 조용히 식사하는 게 더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느낌이다. 이제 식사 시간은 진정 나만의 시간이 되었다. 나와 음식과의 만남만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마주하며 작은 자유를 만끽한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자유다. 고동안 TV는 내 소중한 자유를 침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식 자체가 가진 본성을 섭취한다. 각 음식마다 보유한 고유의 에너지를 전달받는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식탁에서 혹은 혼자라도 대중음식점에서 맞이하는 즐겁고 유쾌한 식사 시간이 아니어도 혼자 음미하는 시간이 이렇게 값진 줄 이제야 깨닫다니. 음식물이 아무 소리도 없이 몸 안에서 활발하게 소화되는 과정을 상상한다. 원활한 혈액순환처럼 내 몸의 구석구석에 영양분이 도달한다. 음식이 몸으로 스며드는 과정처럼 보인다.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음식 때문에 발생하는 생명을 유지하는 신비로움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살게 하는 모양이다. 나는 매일 매 식사 시간마다 음식물과 진심으로 마주한다. TV가 없는 또 다른 세상을 만끽한다.


고요한 가운데 음식에만 집중해서 먹는 시간을 가졌을 때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마치 산책을 하는 것처럼 음식을 먹으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주로 하는 일이 독서와 서평과 에세이를 쓰다 보니 어떤 책을 읽을 것이며 서평이나 에세이는 또 어떤 주제로 쓸 것인지에 대해서 찰나의 아이디어가 찾아온다. 지난번에 읽은 책에 대한 내용이 떠오르거나 블로그에 썼던 글을 어느 부분에서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음식을 먹는 그 짧은 시간에 이처럼 다양한 생각들이 잠재의식을 뚫고 의식의 영역으로 도달한다. 멍하니 음식만 먹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한 가지에 집중할 때 사고는 더 왕성해지는 게 아닐까. 식사 시간에 맞은 작은 변화가 사고의 불씨를 살리는 일이 되고 있다. 좋은 징조다. 진작 TV를 보지 말 걸 그랬다. TV를 포기하니 책이나 글과 한 뼘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죽은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 예민한 촉수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내게 주어지고 보이는 사물과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뭔가를 표현해야만 할 것 같다. 화분의 식물뿐만 아니라 가구 같은 사물 하나하나가 살아 있어 보인다. 이런, 내 모든 감각이 살아나다니!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그런데 TV만큼이나 무서운 장애물이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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