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책만 읽으면 정말 바보가 될까?

<어느 날 책을 선택했다>

by 나승철

고 신영복 교수는 자신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 9월 5일 초판, 2024년 2월 15일 3판 16쇄, 돌베개)에서 책의 '허점' 또는 '맹점'에 대해 논한다. 책은 실천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 의해 집필된 경험의 간접 기록이고, 집필자 개인의 관심이나 이해관계 속으로 도피해버리거나 전문분야라는 이름 아래 지엽말단을 과장하여 근본을 흐려놓기 일쑤라고 말한다. 그런 이유로 책에서 얻는 지식은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고, 실천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허약한 가설이고, 낡은 교조에 불과할 뿐이어서 미래의 실천에 아무 도움이 못 된다. 책의 지식이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며, 지식인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키고 기껏 권위의 전시물 정도라고 덧붙인다. 주로 책을 통해 지식을 쌓은 지식인 또는 지성인의 관점에서 책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다. 과연 신 교수의 말대로 지식은 책이 아닌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존재하는 것일까.


독서의 장점은 책의 발명 이래 수많은 이들에 의해 증명되었고 아직도 그것은 여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인공지능의 발달로 종이책과 독서의 위기 시대에 책을 선택한 나로서는 독서의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책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자기 스스로 책만 보는 바보(간서치, 看書痴)로 불렀다는 이덕무(1741~1793)다. 그는 왜 스스로를 간서치로 불렀을까. 신 교수의 말처럼 책만 보면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서자로 태어난 이덕무는 책을 읽으며 고달픈 삶에 큰 위로를 얻어 책만 읽는 책벌레가 되었고, 그로 인해 벼슬까지 했으니 책의 가치를 몸소 체험한 산증인인 셈이다. 그런 그가 자신을 하대하며 바보라 부른 것은 단지 겸손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책만 읽어서는 지식과 관련한 벼슬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기에 당연히 바보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책을 선택한 후 책에 푹 빠져 살면서 책과 독서에 관한 여러 명언들을 검토하는 습관이 생겼다. 책에 길이 있고, 독서는 사람을 만든다는 말부터 책과 독서 관련해서는 수많은 금언들이 존재한다. 거의 모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책벌레, 또는 독서가가 되어 보니 신영복 교수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떤 친구는 내가 책 속에 갇혀 살다 보니 굉장히 협소한 사고를 한다고 지적했다. 세상은 책보다 훨씬 넓고 깊으니 책 속에만 빠지지 말고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책을 읽다 보면 이 책 저 책,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게 된다. 읽어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생각에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리식톤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 나중에는 자기 몸까지 뜯어먹는다. 허기진 배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의 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세상에는 읽을 만한 좋은 책이 너무 많고, 인생은 짧으니 책 읽기에는 만족이란 없다. 읽어도 읽어도 정신의 배는 고픈 것이다. 책에 빠지면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틈이 없으니 책으로만 아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덕무처럼 책을 읽으면 세상의 근심 걱정거리가 사라진다. 사라지기보다는 잊게 된다는 말이 정확하다. 파도 같이 밀려오는 고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붙는다. 책이 주는 위로와 위안 때문에 세상 시름이 가벼운 것으로 여겨진다. 독서는 자신을 낮추게 하고 생활고에도 적응하게 한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문제일지는 몰라도 책에 빠진 사람에게는 어떤 문제든 하향 평준화된다. 책의 세상을 이해하면서 정신적인 유희를 즐기는 이는 더 어려운 논증 같은 문제에 도전한다. 박학다식이란 말을 듣게 되는 독서가는 대화와 토론 및 발표에 자신감을 갖는다. 유구한 시간을 견딘 고전을 보면서 삶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를 숙고하고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성찰의 시간과 새로운 다짐 또한 책벌레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정체성, 가치관, 세계관의 보정과 정리 후에 강력한 소신이 주어진다. 책 읽기가 인풋이라면 글쓰기는 아웃풋이다. 많이 읽으면 쓸 거리도 많아지고 자신의 글쓰기 실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회나 공동체의 선은 무엇인고 정의는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여러 사례와 상황에 깊이 파고든다. 나쁜 편에 서거나 이용당하지 않고 좋은 편에 서서 좋은 편을 응원하려고 노력한다. 이쯤에서 과연 책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을 현실에서 강력한 의지로 실천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도출된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책과 강연을 보고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수많은 저자들의 자기 계발서와 자기 계발 관련 강사들의 강연을 보면 어떤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의심이 간다. 그들은 거의 모두 독서 예찬론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책을 많이 읽어서 유명해진 경우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그들은 책을 대충 읽어서일까, 아니면 많이 읽었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일까. 신영복 교수의 책과 관련한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이처럼 차고 넘친다. 책을 제대로 읽는 일, 정말 어렵다. 많이 읽으면서 제대로 읽기가 어렵다. 화려하고 뛰어난 글쓰기 솜씨를 발휘해 쓴 글이 담긴 베스트셀러에 오른 도서 역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정도의 수준인 경우도 많아, 그런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쓸모없는 책으로 변한다.


어떤 출판사 관계자는 책 읽기와 독서 관련 내용의 원고들이 물밀듯 투고 형식으로 출판사에 들어온다고 말한다. 다독을 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바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한 책을 내고 싶어서 그렇단다. 그는 독서로 깨달은 그 좋은 걸 자신만이 아닌 대중과 함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하나 너무나 비슷한 내용이 많아 책 출간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전한다. 독서의 명시적 가치는 분명하지만 그 가치가 실천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사실 앞에 다시 한번 신영복 교수의 말을 되새긴다. "문자를 구하는 지혜가 올바른 것이 못 됨은, 학지어행(學止於行), 모든 배움은 행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함으로써 비로소 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책만 읽고, 책 속에 빠져 사는 삶은 실천할 수 없는 죽은 지식만 양산한다는 말인가. 나 같은 독서가에게는 정독에 의한 다독이 필요하다. 특별한 고전이나 명저를 제외하곤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시간은 없다.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책이 몇 트럭 분량은 되니까 말이다.


책을 사랑하고 책에 온전히 빠져 사는 이에게 닥친 고민은 깊고 넓다. 산더미의 책을 읽어야 하고 제대로 읽어야 한다. 책에 빠진 채 세상물정 모르고 산다는 비아냥까지 들을 수도 있다. 독서가에게 독서에 빠진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너무도 가혹하다. 불가역적 시간의 여정을 지나온 까닭이다. '바보의 역설'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바보임을 인정하면서도 살아있는 경험을 쌓을 방법을 모색하며 실천하는 독서가의 길을 가고 싶다. 버텨보자, 인생은 버티기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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