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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승철 Oct 30. 2022

<서평> - 하얼빈(김훈, 문학동네)

- 안중근 의사의 거사 - 

<하얼빈> - 김훈(문학동네)


시대의 악과 맞서 싸운 이,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선 이,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로 거사를 치른 이, 안중근 의사에 관한 저자 김훈의 고백록과 같은 책으로 2022년 8월에 나왔다.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야만 안중근은 자신의 생각이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음을 알았다. 일본을 대표하는 이토를 제거해야만 세상은 일본 제국주의의 대한제국 침탈을 제대로 알 수 있기에! 안중근과 이토는 하얼빈에서 만난다. 그 두 사람이 하얼빈에 도착하는 여정에 마지막 결론이 추가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멋진 글로 도배된 다큐.

1908년 1월 7일, 일본 천황 메이지는 도쿄 황궁에서 대한제국 12살 황태자 이은을 접견한다. 한국 통감인 이토가 보육을 책임지는 자격으로 1907년 말에 이은을 일본으로 데려왔다. 이토는 고종을 퇴위시키고 고종의 차남인 이척(순종)을 보위에 앉혔고, 이은은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이은이 도쿄에 도착할 때에는 메이지의 황태자 요시히토가 마중을 나왔다. 메이지는 이은에게 장난감 말 하나와 황실 문장이 새겨진 탁상시계를 선물했다. 조선에서는 조정과는 달리 백성들의 봉기 사태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토는 두려움에 '대토벌 계획'을 기획하고 명령한다. 

1905년 12월. 상해에서 돌아온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진남포에 도착하여 고향땅 청계동에서 뒤늦게나마 몇 달 전 별세한 아버지의 무덤에 절하며 통곡한다. 밖으로 도는 아들의 기질을 누르기 위하 아버지는 응칠이라는 이름 대신 무거울 중, 뿌리 근으로 아들의 이름을 바꾸었지만 허사였다. 청계동에 성당을 세운 지 7년째인 빌렘 신부는 세례를 통해 안중근에게 도마, 중근의 아네인 김아려에게는 아그네스, 아들 안분도에게는 베네딕도라고 명명했다. 순종은 1909년 1월 7일, 6박 7일간의 남순을 이토와 기차로 떠난다. 부산항에는 메이지가 보낸 욱일기 달린 기함 아즈마호에도 오르며, 마산을 거쳐 서울로 복귀하는 여정이다. 일본제국의 문명화된 우호 정책을 과시하고 강대 약의 친선까지 과시하려는 이토의 계획임은 물론이다. 

이토는 신의주에서 출발하여 하얼빈, 북경, 모스크바와 유럽을 잇는 철로를 꿈꾼다. 이번에는 순종과 서북행을 실시하여 개성, 평양, 신의주를 기차로 올라, 고려 왕궁터인 개성의 만월대도 돌아본다. 해군 기함과 만월대에서 사진 찍힌 순종의 모습은 조선의 운명과 앞날을 세계 언론에 알리는 홍보용으로 사용된다. 진남포로 이사한 안중근은 작은 학교를 열고 영어, 지리, 국사를 가르친다. 본가인 청계동에 들릴 땐 노루나 꿩 등을 사냥을 하여 여러 명의 숙부와 아들과 함께 모여 술잔치를 벌인다. 문경의 이강년, 원주의 이인영, 임진강 일대의 이은찬, 전북 태안의 최익현, 경북 영해의 신돌석 등 많은 의병들이 세력을 이루어 일본 제국에 대항하지만 대개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셋째를 임신한 김아려를 두고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우라지)로 떠나는데 황해도 신천을 출발하여 서울, 부산, 함경남도 원산, 러시아령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한국군이 해산되기 한 달 전,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고 이토는 고종을 꾸짖은 후 순종을 앉힌다. 조정은 온통 이토의 권세를 따른 반면, 백성들은 농장기를 들고 맞선다. 이토가 일본 추밀원 의장직에 내정되면서 후임은 소네로 결정된다. 미래를 향한 제국인 일본은 조선의 독립이나 동양 평화는 물론 문명개화를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토는 조선은 열복(悅服, 기뻐서 따름) 하는 자세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이토를 눌러야만 한다는, 그의 존재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골병처럼 안중근의 몸에서 자라났다.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중근은 이토가 1909년 10월 하순 께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 장관인 코콥초프와 만주횡단철도 관리권 협상을 위해 회담할 예정임을 언론을 통해 접한다. 도쿄, 시모노세키, 대련, 여순, 봉천, 장천, 하얼빈 등 이토가 거치는 장소마다 일본 거류민들을 비롯한 외교 인사들의 환영 행사가 이어진다. 일본 제국의 힘을 만방에 알리면서 자신들의 애국심이나 자부심도 확인하려는 행사다. 우라지에 사는 의병대 부하였던 우덕순이 자연스럽게 안중근의 거사에 합류한다. 그 둘은 거사를 위해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교감이 이루어진 상태다.   

중근은 여비 마련을 위해 이석산을 협박하여 100루블을 빼앗은 다음 날인 10월 21일 오전 8시 50분, 우덕순과 하얼빈행 열차를 탄다. 기차는 40시간 걸려 22일 밤 9시 15분 도착하였고, 둘은 하얼빈 한인회장인 김성백의 집에 머물면서 옷을 사 입고 이발까지 하며 거사를 준비한다. 이토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에 도착 예정이다. 안중근은 만주 길림성 수분하 세관 주사인 정대호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가족인 김아려와 두 아들을 하얼빈으로 데려다 줄 것을 요청한 상태다. 큰딸인 현생은 수녀원에 맡겨지면서 김아려와 두 아들인 분도와 준생은 평양에서부터 정대호를 따라 하얼빈으로 이동 중이다.   

M1900 권총을 소지한 안중근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역으로 가 현장을 철저하게 점검한다. 우덕순은 하얼빈역이 아닌 이토가 잠시 정차하는 채가구역에서 기회를 엿보기로 한다. 하얼빈역 플랫폼, 러시아와 청나라 의장대와 장교단 및 외교단은 물론 일본 고위급과 민간인들이 도열하고, 코콥초프도 미리 도착하여 이토를 기다린다. 10월 26일 오전 9시 10분, 드디어 열차가 도착하여 내린 이토를 향해 러시아군 뒤쪽에 위치한 안중근의 총구가 여러 번 불을 뿜는다. 이토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안중근은 "코리아 후레!"(코리아 만세!)를 외치며 러시아 헌병들에 체포된다.  

이토 사망 소식을 들은 황태자 이은은 순종에게 전문을 보내고, 순종은 메이지와 이토의 정실인 우메코에게 위로 전문을 보내는 동시에 통감부에 가서 조문하며 조문금 10만 원을 전달하며, 죽은 이토에게는 '文忠'이라는 시호까지 내린다. 이토의 시체는 대련에 도착한 후 요크스카항으로 출발한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고위 관리들은 역시 분향하는데 바쁘고, 한국 황실은 일본 황실에 거듭 사과한다.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거사일 저녁에 소식을 듣고 안중근의 행위는 대죄라고 생각한다. 뮈텔은 청계동에서 19살 안중근을 본 적이 있다. 명동대성당 봉헌 뒤 몇 달 후 빌렘과 안중근이 뮈텔에게 온 일이 있는데, 그때 안중근은 뮈텔에게 조선에 대학교를 세워달라는 부탁을 했고, 뮈텔은 가당치 않다는 말을 중근에게 전했다. 

안중근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지하 구치소에 끌려가는데 그곳에는 우덕순과 정대호도 끌려왔다.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가 중근을 신문한다. 법정에서 이토의 죄악을 말하고 처분을 맡기겠다는 중근은 이토의 생사는 알지 못했다. 이어 관동도독부가 있는 대련으로 호송된 중근은 11월 3일, 뤼순감옥에 수감된다. 다음 날, 이토 영결식이 도쿄 히바야 공원에서 거행되는 한편, 서울의 장충단에서는 황실 내각과 민간인 합동 관민 추도회가 열린다. 거사일 다음 날에 정대호와 김아려 일행이 하얼빈에 도착했고, 28일에는 정대호의 체포와 김아려 일행이 연행되어 신문을 받는다. 김아려는 안중근이 자신의 남편임을 강하게 부인하지만, 5살 안분도는 사진을 보고 아버지가 맞는다고 진술한다. 조선에서는 사죄를 위해 조선 13도 인민 도일 대표단이 결성된다.  

방청객이 가득 찬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1호 법정에서 안중근과 우덕순이 출두하여 재판장 마나베와 검찰관 미조부치에 의해 재판이 진행된다. 일본 외무성은 관동도독부에 이미 안중근의 사형 방침을 전달한 상태다.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이토의 살인 행위를 비난하고 동양 평화를 위한 조건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증언한다. 이후 공판은 1910년 2월에 6번 이어지고, 미조부치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우덕순에게는 징역 2년을 구형한다. 단순한 무지와 오해의 소치라는 것이 구형 이유였다. 2월 14일, 안중근에게는 사형, 우덕순에게는 3년이 선고된다. 항소를 포기하는 안중근이다. 빌렘 신부는 사제와 교회를 배반했다는 등의 차고 넘치는 안중근의 죄에 대해 강론한다. 감옥에서 '안응칠의 역사'를 쓰는 중근, 다시 '동양평화론'까지 저술한다.   

여순으로 면담 갈 것을 신청하는 빌렘에게 허락하지 않는 뮈텔이지만, 빌렘은 안중근을 만나러 여순으로 간다. 죄를 뉘우치라는 빌렘에 맞서 안중근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빌렘과 함께 온 막냇동생 공근에게 자신을 하얼빈에 묻으며 독립 후에는 한국으로 옮기라고 안중근은 부탁한다. 묘지와 기념비 등 추모 계획을 세우는 한인 사회이지만, 관동도독부는 안중근의 신격화를 우려하여 감옥 구내 묘지에 안중근을 묻으라 지시한다. 3월 15일에 '안응칠 역사'는 탈고된 후, 3월 26일에 안중근은 세상을 떠난다. 시신을 인수하려는 정근과 공근은 거절당하고 시신은 감옥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지금까지도 안중근의 시신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아픔을 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후기'를 통해 직계가족이나 문중 인물이 박해, 시련, 굴욕, 유랑, 이산, 사별 등에 관한 내용을 소개한다. 안중근의 거사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그를 '죄인'으로 남게 했으나, 1993년 8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이 최초로 그를 위한 추모 미사를 집전하며 '정당방위' 타당성을 인정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결과다. 우덕순은 이후 항일운동을 계속했으며 광복 후에는 안중근 현양 사업을 이어갔다. 장남인 안분도는 7살에 죽었고, 차남인 안준생은 1939년 10월 15일, 장충단 공원 내의 이토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에서 이토를 분향하고 이토의 아들 이토 분키치에 사죄한다. 더군다나 그는 광복 직후 중국 장제스에게 김구의 교수형까지 부탁한 적이 있다. 

장녀인 안현생은 1941년 3월 26일, 남편과 함께 박문사에 가서 참배하며 사죄한다. 동생인 안정근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며 독립운동에서의 지도자로 활약했고, 안공근 역시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어떤 역사학자는 일본이 한국에 끼친 피해를 만회하려면 한국이 일본을 침입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견을 표현했다. 그만큼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에 몸과 정신은 물론 영혼까지 침탈 당하고 말았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 꾸민 식민사관을 대더라도 일제의 식민 역사는 비참하고 처참한 결과일 뿐이다. 

김훈의 간결하고 핵심만 표현하는 묘사 때문에 한국 근대사가 말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광복 후에도 친일파의 득세를 막지 못한 철천지 한을 이 책을 통해 아주아주 조금이나마 토해낼 수 있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는 말도 기억해야 한다. 아직도 제대로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이, 식민사관으로 오염된 한국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단 한 치라도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말과 생각에 맞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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