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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승철 Nov 08. 2022

<내 인생의 책 6>-'셰익스피어 4대 비극'

- 영문학의 정수를 만나다 - 

<내 인생의 책 6> - '셰익스피어 4대 비극'(셰익스피어, 신상웅 옮김, 동서문화사)

1564년 4월 23일 영국 위릭셔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서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셰익스피어는 자서전이나 일기 같은 개인적 삶을 남기지 않았다. 문인 집안 출신도,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한 인텔리도 아니다. 소년 시절 문법학교에서 라틴어 교육을 받음으로 그리스 로마 작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만으로 그의 명성을 짐작하기엔 너무 부족한 점이 많다. 1616년 4월 23일 운명의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그를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가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에는 작가들이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나 남의 작품들을 개작하는 경우가 흔했고, 오늘날과 같은 저작권이란 개념이 없었다. 셰익스피어 역시 그때까지 전하는 이야기들을 참고하거나 결말을 바꾸는 등 개작의 범위로 볼 수 있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남의 작품을 손댔다 하더라도 그의 위대함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든지 그의 손을 타면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깊은 반성과 놀라운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비극은 '인간은 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와 '참혹하고 비참한 사건은 인간에게 왜 어떻게 일어나는지' 상세하게 보여주는 통찰을 간직한다. 근거 없는 낙관을 피해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무게를 깨닫게 함으로 좀 더 고귀한 인생을 살도록 권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 저자가 펼치는 4대 비극은 인생의 축소판이며 결정체이다. 청년기의 '햄릿'으로부터 장년기의 '오델로'와 '맥베드', 노년기의 '리어 왕'을 통해 한 평생 어떤 선택으로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 깊은 성찰의 세계로 빠져들어 본다.


<햄릿>


1601년 무렵 저술됐고 작품 길이는 약 3,900줄 정도로 1576년 영국에 대중극장 최초 설립되어 공연되었다. 아들 햄닛(Hamnet)과 아버지 죽음이 관련된 주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극 중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이자 비텐베르크 대학생으로 고귀하고 지적이며 감수성 풍부하고 늘 명상에 빠지는 캐릭터이다. 부패한 덴마크의 앞날과 아름답지 못한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표출한다. 순수하고도 이상주의적 청년 시대의 원형은 시대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은 이유이다.

”소중한 애정일수록 부서지기 쉽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늘 그렇듯, 모든 등장인물들은 존재감이 있다. 어느 인물 하나 쓸모없지 않다는 말이다. 선악의 경계에서 인간 존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도덕적, 윤리적 가치 판단을 뛰어넘는 작품의 의의를 갖는다.


선왕인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 자기가 동생에게 독살당했으니 복수를 부탁한다고 하자, 햄릿은 어머니의 변절과 현왕인 숙부에 대한 복수를 꿈꾸면서도 괴로움에 시달리며 복수를 미룬다. 왕의 본심을 살피기 위해 궁전에서 아버지 살해 당시와 똑같은 연극을 공연하게 하고 왕은 살해 장면에서 격한 반응을 보이자 햄릿은 복수의 마음을 굳힌다. 왕비인 어머니와 말다툼 중 햄릿은 플로니어스 재상을 죽이게 되고, 재상의 딸이며 햄릿과 연분이 있었던 오필리어는 미쳐서 나중에 물에 빠져 죽게 되고 재상의 아들 레어티스는 햄릿에게 복수할 마음을 품는다.


왕은 햄릿을 영국으로 보내 죽이려는 음모를 실행하지만 실패한다. 왕은 다시 꾀를 내어 레어티스와 햄릿에게 검술 시합을 부추기고 레어티스는 칼에 독을 묻혀 시합을 벌인다. 또 다른 왕의 계략은 햄릿이 시합 중 잠시 쉬는 틈을 타서 먹이게 할 독이 든 술을 준비한 것이다. 시합은 시작되고 독이 든 술은 왕비가 마시고 죽게 되고 햄릿과 레어티스는 싸우는 중 독이 든 칼에 맞아 둘 다 죽는다. 죽기 전 레어티스가 왕의 계략을 말하자 햄릿은 독이 든 칼로 왕을 찌르고 독배를 왕의 입에 부어 죽게 만들고, 덴마크의 대를 이을 자로 노르웨이의 포틴브라스를 거명하고 마지막 숨을 거둔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아내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고통의 물결을 두 손으로 막아 이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가? 죽는 건 잠드는 것, 그뿐이다. 잠들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마음의 번뇌도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도, 그렇다면 죽고 잠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열렬히 찾아야 할 삶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잠들면 꿈도 꾸겠지. 아, 여기서 걸리는구나. 이 세상의 온갖 번뇌를 벗어던지고 영원히 죽음의 잠을 잘 때 어떤 꿈을 꾸게 될 것인지, 이를 생각하면 망설여지는구나. 이 망설임이 비참한 인생을 그렇게도 오래 끌게 하는 것이다. 그렇잖으면 누가 참겠는가, 이 세상의 비난과 조소를, 폭군의 횡포를, 세도가의 모멸을, 모욕당한 사랑의 고통을, 질질 끄는 재판을, 관리들의 오만을, 덕 있는 사람이 당해야 하는 소인배의 불손을? 한 자루의 단도면 깨끗이 청산할 수 있는 것을, 누가 이 무거운 짐을 지고 따분한 인생을 신음하며 진땀을 빼겠는가? 죽은 뒤의 그 어떤 두려움과 한 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결심을 무디게 하고, 그래서 미지의 저승으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참게 만드는 것인가? 분별심 때문에 우리는 모두 겁쟁이가 되는구나. 생기 넘치던 결심은 창백한 병색으로 물들고, 의기충천하던 의지도 그 때문에 옆길로 빗나가 실행의 힘을 잃고 만다. 가만, 이 아름다운 오필리어, 숲의 여신아! 기도 중이거든 내 죄의 용서도 함께 빌어 주오.”


슈퍼 영웅이 잘못을 저지르고 엄청난 운명을 맞이하는 그리스 비극과 닮은 점이 있다. 다른 점은 중세의 운명의 여신은 눈이 멀어 운명의 수레바퀴를 제멋대로 돌린다는 것이다. 서양 근대성과 내면성을 간직한 햄릿, 서양문명의 텍스트를 만들었다. ”햄릿은 왜 복수를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가?” 18세기 말의 감성적 인간상으로 비약. 우유부단한 인물 상징인 햄릿을 사람들은 작품의 가공 인물이 아닌 현실의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햄릿은 너무나 고결하고 도덕적이어서 복수를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는 사람이다.” - 괴테

“햄릿은 지성적 인간의 비극” – 콜리지

“햄릿은 현대적으로 분열된 자아를 보여준다.” – 브래들리

“햄릿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콤플렉스다." – 프로이트

“햄릿은 진짜 사람의 심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 프로이트


햄릿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무의식에 잠재, 그것을 이룬 숙부를 처단하지 못하는 괴로움과 종교 때문에 자살하지 못하는 고뇌가 햄릿의 정신 상태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프로이트가 정한 서양 3대 걸작은 ‘오이디푸스 왕’, ‘햄릿’.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모두 아버지 살해라는 모티브이다. '나도 역시 햄릿형 인간인가?'


<오델로>


1604년 11월 화이트홀 궁전에서 첫 상연되었고, 원제는 ‘베니스의 무어인’이다. 극의 장소는 이탈리아 베니스(베네치아), 사이프러스(키프러스)로, 동서양의 정점인 베니스는 국제 상업 도시이고, 동방의 대국인 투르크에게 늘 위협 받는 곳이었다. 개막부터 폐막까지는 단 3일이고, 26살 나이 차이, 현실과 환상을 혼동한 한 늙은 남자(무어인, 북아프리카와 아랍인 등의 혼혈, 니그로보다는 아랍인 형상)의 파멸 과정이, 음모의 덫에 걸린 핏빛 사랑과 질투가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캐시오가 자신 대신 부관이 된 것에 원한을 품은 이야고, 브러밴쇼에게 딸을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로더리고는 가슴에 증오의 칼을 간다. 훌륭한 전사인 오델로는 브러밴쇼와 그의 딸 데스데모나에게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가까이 지내다가, 데스데모나와 연분을 맺고 비밀결혼을 올린다. 브러밴쇼는 분노하지만 딸의 진심을 듣고 어쩔 수 없이 허락한다. 베니스 공작의 지시로 전쟁터인 사이프러스로 가는 오델로, 데스데모나는 남편과의 동행을 원하여 같이 떠난다.


오델로의 기수인 이야고는 캐시오와 데스데모나가 정을 통하는 사이라는 걸 거짓으로 꾸며 오델로의 귀에 들어가게 하는 광범위하고 치밀한 흉계를 꾸민다. 이야고의 부추김으로 로더리고는 캐시오와 싸우고 그 와중에 몬타노가 중상을 입자, 오델로는 캐시오를 부관에서 파직시킨다. 괴로워하는 캐시오에게 이야고는 데스데모나에게 복직을 간청하라 권하자 그의 말대로 따른다. 이야고의 아내이자 데스데모나의 여종인 이밀리아가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을 이야고에게 준다. 손수건은 오델로의 어머니의 것으로 매우 소중히 여기던 것이다.


이야고는 아버지를 버린 행적을 비유하여 데스데모나의 행실에 문제가 있음을 오델로에게 조금씩 각인시키고, 오델로는 점점 괴로워하면서 이야고에게 증거를 대라 윽박지른다. 데스데모나는 평소 캐시오를 좋은 사람으로 여겨 그의 복직 부탁에 최선을 다해 오델로에게 선처를 요구한다. 이야고가 계속 전하는 둘의 부정한 관계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오델로는 데스데모나의 캐시오 복직 부탁에 더욱 의심을 굳힌다.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이 캐시오에게 있음을 확인한 오델로는 결백을 말하는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다.


로더리고가 이야고의 부추김으로 캐시오와 칼싸움을 하다, 오히려 이야고의 칼에 죽는다. 오델로는 이야고와 이밀리아 앞에서 자기가 데스데모나를 죽였다 말하면서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된 것은 이야고 때문이라 말하자, 이밀리아는 이야고의 흉계를 알고는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오델로는 이야고에 달려들고 이야고는 이밀리아를 찌르고 퇴장한다. 이밀리아는 데스데모나의 결백을 주장하며 숨이 끊어지고 오델로는 자책하며 자살을 선택한다. 캐시오가 사이프러스를 통치하고 이야고 재판을 맡는다.


질투로 광란에 빠져 파멸되어가는 전장 최고의 용사 이며 인격적으로도 훌륭하고 고결한데다 용감하기까지 한 무어인 오델로, 데스데모나와 비밀 결혼을 하며 파국을 맞이한다. 행복한 사랑과 신혼 앞에 드리운 음모와 덫, 신마저 질투한 핏빛 사랑이 전편에 흐른다. 사랑과 질투의 강렬한 묘사가 오금을 저리게 하고, 최고로 아름다운 연애(사랑)를 하면 걸리게 되는 질투의 병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먹먹하게 한다.

가상이 현실을 이겼다. 상상은 현실에 손수건을 남겼다. ’~카더라’ 통신에 오늘도 하염없이 끌려다니는 현대인의 어리석은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버드나무의 노래' -데스데모나의 마지막 노래

“가여운 한 처녀가 앉아 있네. 무화과나무 곁에서 한숨을 쉬며

푸른 버드나무를 노래하네.

손은 가슴에 얹고 머리는 무릎에 얹고

버들, 버들, 버드나무를 노래하네.

그녀 곁에서 아름다운 시냇물이 속삭이네.

버들, 버들, 버드나무를 노래하네

그녀가 눈물지을 적에 굳은 바위마저 슬피 우네..

버들, 버들, 버드나무를 노래하네.

버들가지는 나의 머리장식

아무도 그분을 탓하지 말아줘요, 모든 건 내 잘못이니까.

그분에게 사랑이 거짓이라 했더니, 그분이 무어라 대답하셨더라?

버들, 버들, 버드나무를 노래하네

내가 다른 여자와 사랑하거든 당신도 다른 남자와 자라.”

<맥베드>


비극 중 가장 짧다.(2082행. 햄릿의 절반) 장소는 스코틀랜드 및 영국으로, 1606년 쓰여서 당시 제임스 1세의 처남인 덴마크 국왕 크리스천 4세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초연되었다. 왕권신수설을 주창한 제임스 1세의 영향으로 셰익스피어가 국왕 시해와 왕권 찬탈이 부른 국가적 무질서와 찬탈자의 파멸을 그렸다고 한다. 제임스 1세는 뱅코우를 전설적 조상으로 생각하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가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이다.

당시 사람들은 마녀, 유령, 요정 같은 초자연적 존재의 마법, 예언, 주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다른 3대 비극 주인공과는 달리 영웅 이미지는 덜하고, 악역이 없다. 비록 아내가 부추겼다고는 하나 맥베드의 의지가 더 강하여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 스스로 파멸로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코더 영주가 노르웨이 원조까지 얻어 반란을 일으키지만 용감한 맥베드 장군이 물리치고 대신 영주 자리까지 오른다. 맥베드와 뱅코우가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녀 셋이 나타나 맥베드가 장차 왕이 될 것이고 그 후에는 뱅코우의 자손들이 왕이 될 것이라 예언한다. 맥베드가 마녀의 예언을 편지로 아내에게 알리고 아내는 흉계를 꾸미며 맥베드에게 던컨 왕을 죽이라 부추긴다.


맥베드의 승리를 축하하러 온 왕이 그의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되고, 맥베드는  마음의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지만 결국 왕을 죽인다. 아내가 살인에 사용한 칼을 술 취한 호위병 둘에게 지니게 해 그들이 살해한 것처럼 위장하고, 맥베드는 왕의 죽음이 밝혀진 이후 곧바로 호위병 둘을 죽임으로 살인죄를 덮어씌운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왕의 큰아들 맬컴은 영국으로, 작은 아들 도날베인은 아일랜드로 도피하자 왕의 살해 혐의를 받는다.


왕이 된 맥베드는 마녀들의 예언이 맞은 것과 이후의 예언을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내 뱅코우와 그의 아들 플리언스를 죽이라 명하고, 뱅코우는 자객들의 손에 죽고 플리언스는 간신히 도망간다. 영국 왕실의 보호를 받고 있는 맬컴에게 맥다프가 합세하여 맥베드의 행실을 의심하자, 그 사실을 안 맥베드는 맥더프 성을 칠 준비를 하면서도 불안하여 다시 마녀들을 찾아가 만나 한 환영으로부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 맥베드와 맞설 자는 없’다는 말을 듣는다.


자객들이 맥베드의 명으로 맥다프 처자식들을 죽인다. 맥다프의 동생인 로스가 그 사실을 맥다프에게 알리고 맬컴과 영국 장군 시워드, 맥다프가 1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치러간다. 맥베드 부인이 몽유병을 앓다가 자살하고, 많은 수의 대신들이 맬컴 편이 되고 군사들도 맥베드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의 충성심은 없다. 전쟁이 벌어지고 시워드의 아들이 맥베드의 칼에 죽지만 맬컴 군대가 승리를 거둔다. 달이 차기 전에 어머니의 배를 찢고 나온 맥다프에게 맥베드가 칼에 맞아 죽는다. 맥다프가 맥베드의 머리를 장대에 꽂아들고, 맬컴은 왕위에 올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치하한다.   


시간의 흐름에 얽매이는 인간, 자유롭고 해방된 인생은 존재하는가 . 맥베드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장악하지 못 했다. 선악과 도덕적, 윤리적 가치판단을 뛰어넘은 작품의 의의가 보인다. 비극은 독자들에게 죄지은 자에게도 깊은 동정심 발휘케 한다. ’핏빛으로 물들이다’는 말이 부정한 죄로 붉게 물들이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엷은 복숭아 빛이나 고기 색깔로 사용하였다.

“셰익스피어 비극 중 가장 격렬하며, 가장 응축되어 있고, 가장 엄청나다.” - A. C. 브래들리


인간의 헛된 야망에 대한 어리석음을 통찰력 있는 묘사로 보여준다. 짓궂은 마녀의 말장난이 마음속으로 침투하다. 왕의 시해를 두고 끊임없이 갈등하는 맥베드, 성마르고 냉혈적인 모습과 도덕적 본성을 지탱하려는 갈등이 관객에게 동정심을 유발한다. 맥베드 부인의 강렬한 캐릭터는 후반으로 갈수록 무뎌진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이요,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 마녀들


세상의 혼란한 가치 표현 묘사 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한 선과 악으로 규정할 수 없다. 얼마나 좋아 보였던 왕권이었나.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죽어야 할 사람, 한 번은 그런 소식이 있을 것이 아닌가. 내일, 내일, 또 내일은 매일 살금살금 인류 역사의 최후 순간까지 기어들고, 우리의 어제라는 날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 무덤으로 가는 길을 비춰왔다..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아! 인생이란 한낱 걷고 있는 그림자, 가련한 배우일 뿐이다. 제시간엔 무대 위에서 활개치고 안달하지만, 얼마 안 가서 영영 잊혀 버리지 않는가. 그것은 천치가 떠들어 대는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 – 맥베드(부인의 사망 소식에)


<리어 왕>


1606년 집필 된 것으로 보이고, ’레어 왕(King Lear)’의 전설 참고했다. ‘레어 왕’의 초기 작품에는 세 딸 가운데 두 딸의 불효에 고생하지만 결국은 왕좌를 되찾는 내용인데, 셰익스피어는 결말을 바꾸었다. 80세의 노인의 리어 왕, 셰익스피어의 두 배의 나이이다. ’자식의 배신’이 작품의 모티프로 리어 왕과 글로스터 백작은 같은 처지이다.


권력과 치정에 눈먼 자들의 진흙탕 같은 증오와 싸움 이 핏빛으로 물든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상처 입고 부정당해 소모되어 가는 과정이 자세히 묘사된다. 개인을 넘어 가정, 사회, 국가 차원으로 확장되는 갈등의 모습이다. 모두의 파국인 대단히 부정적인 결말이며 냉정한 현실 세계 표현했다.


리어 왕은 왕국을 세 딸에게 나눠주려 결심하고 세 딸의 충성심을 듣고자 한다. 거너릴과 리건은 효도를 다짐하며 제 몫을 받고, 막내 코델리아는 효심을 솔직하게 표현하지만 리어 왕이 듣기에는 대신들 앞에서 모욕을 느껴 그의 몫을 언니들에게 주고 저주를 퍼붓는다. 코델리아에게는 결혼 지참금도 전혀 주지 않겠다고 말하고 두 딸에게 한 달씩 머무를 것이라 선포한다. 이에 강력한 항의를 하는 켄트 백작은 리어 왕이 추방한다. 코델리아의 인품을 높게 산 프랑스 왕은 그녀를 왕비로 데려가고 거너릴과 리건은 아버지의 포악한 성격에 두려움을 느껴 서로 대책을 논의한다.


글로스터 백작의 서자인 에드먼드는 신세를 한탄하며 형인 에드거를 모함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독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분노한 글로스터는 에드거를 잡으려 하고 에드거는 변장을 하고 피해 다닌다. 켄트는 변장을 하고 리어 왕 곁으로 와서 시중을 들고, 리어 왕은 거너릴에게 푸대접을 받고 리건에게도 모욕을 당해 100명이나 되던 시중들을 잃고 극에 달한 분노로 실성한 상태가 된다. 


코델리아의 설득으로 프랑스 군대가 영국으로 와 전쟁을 준비한다. 글로스터는 리어 왕의 처지를 알고 도버로 피난시키며, 프랑스 군대가 리어 왕의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밀서를 받지만 에드먼드가 그 편지를 콘웰에게 주고, 결국 글로스터는 두 눈이 뽑히고 에드먼드의 모함과 에드거의 억울함을 깨닫는다. 콘웰이 글로스터의 눈을 뽑을 때 자기 하인의 변심으로 치명적 상처를 입고 죽게 된다. 글로스터는 거지로 변신한 에드거가 자기 아들인 줄도 모르고 그와 동행하면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에드거의 기지로 죽지 않는다.


거너릴과 리건은 에드먼드에게 연정을 품고 에드먼드는 둘 사이에 갈등하며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 저울질한다. 거너릴이 에드먼드에게 보내는 남편을 죽이고 자기와 살자는 편지를 오스왈도가 간직하고 있다가, 글로스터를 만나 죽이려는데 에드거가 막고 싸움을 벌여 죽으면서 그 편지를 에드거가 소유하여 올버니에게 보여준다. 코델리아가 켄트를 알아보고, 리어 왕은 코델리아를 보고도 헛소리를 하다 비로소 딸임을 인식한다.


전쟁은 영국군의 승리로 끝나고, 리어 왕과 코델리아는 포로가 되어 갇힌다. 리건이 에드먼드를 남편으로 정한다고 말하자 거너릴은 분노하고, 올버니는 에드거가 요청한 대로 에드먼드와 결투를 벌이게 한다. 결투에 진 에드먼드는 죽기 전에 코델리어를 죽여 자살로 위장하라 명했다며 사람을 빨리 보내 막으라 말한다. 에드거의 신분을 확인한 글로스터는 충격으로 죽고, 거너릴은 리건을 독살하고 자살을 선택한다. 코델리어는 이미 죽고 리어 왕은 절규하다 마침내 목숨이 끊어진다. 켄트는 자살을 암시하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사회적 축적의 결과물 이다. 딸도 왕도 죽는, 한 치의 용서도 없는 가혹한 현실 세계를 구현했다. 휘몰아치는 폭풍과 리어 왕의 미쳐가는 과정은 서로 대립하고 호응한다. ’리어 왕’의 상연 횟수가 다른 3대 비극보다 적은 이유는 리어 왕의 감정 폭이 너무 깊고 넓어 표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리어 왕의 오만, 경솔, 독선, 분노, 허세(그와 닮은 글로스터)와 자신만이 옳다는 오만한 마음은 코델리아나 켄트도 마찬가지이다.


거너릴과 리건은 켄트가 쫓겨나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사회구조와 지배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 신구 갈등, 정의와 평등 호소 등이 이 작품의 주제로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극예술” – 18세기 낭만주의자들


리어 왕은 분노에서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 대한 이해와 동정으로, 이후 자기반성과 인간사에 대한 전반적인 깨달음으로의 정신적 과정을 나타낸다. 결국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말한다.

셰익스피어(1564~1616)와 허균(1569~1618)은 동시대 인물로 작중 인물을 통해 서로 닮은 점을 나타낸다. 에드몬드와 홍길동은 서자 출신으로, 개인의 영달과 평등 세상.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차이를 보인다. 세상을 변혁하는 힘이 민중에게 있다는 의식은 비교적 최근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분명히 보였다 할 것이다.  


“둘만을 위한 새장 속의 새처럼 노래 부르자” – 리어 왕

“나는 갈 길이 없으니 눈은 필요 없다. 눈으로 볼 때에는 오히려 잘 넘어졌다. 사람은 의지할 것이 있으면 오히려 방심하게 되거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 아, 내 아들 에드거! 속아 넘어간 아비의 노기에 희생되었구나! 내 생전에 너를 한 번 만져볼 수만 있다면, 나는 시력을 되찾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하겠다.” – 글로스터

“저는 곧 길을 떠나야 합니다. 주인님이 부르시니 마다할 수 없습니다.” - 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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