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승철 Nov 05. 2022

<서평>-'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

-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다! -

<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 - 김광기(김영사)


나는 '천애고아'가 된 지 올해로 10년 차다. 내 편이 없는 자, 바로 나다. 제목이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2018년, 경북대 일반사회학과 교수인 저자가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에, 머리말과 프롤로그 및 에필로그를 덧붙여 2022년 3월에 발간한 책이다. 인생은 여행이며 모두 다 다른 여정을 갖는다. 긴 여행일수록 집과 고향에 대한 복귀 욕구는 커진다. 각기 나름의 개성, 의미, 길의 인생에서의 여행은 고단한 것이다. 'Travel'(여행)이라는 단어는 원래 노동이 필요한 골치 아픈 일을 하거나 상상력을 자극하고 열정적 탐구를 유도하는 행위의 뜻을 지닌다. 인생에 주어진 여행을 가장 잘 수행할 사람으로, 저자는 '이방인'을 지목한다. 이방인은 누구인가, 이방인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우리는 이방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바로 이 책이 소개하는 내용이다. 사회학이라는 용액 안에 철학, 사상, 윤리, 도덕, 심리, 정신분석 등을 담아 잘 섞은 다음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존재, 즉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만들어 제시한다. 


"나를 묻을 때, 어떠한 기념물도 만들지 말고 내 양손을 밖으로 내고 몸만 묻어라. 그렇게 해서 온 세상을 가졌던 사람도 죽을 땐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천하가 알게 하라." - 알렉산드로스 대왕


저자는 미국에서 야간에 지방도로와 고속도로를 가족을 실은 차로 달리다가 낯선 차와 함께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방인끼리 확실한 교감이나 상호 이해가 존재함을 보이면서 이방인이 더 순수하고 깨끗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저자가 말하는 이방인은 물리적 및 인지적 시공간을 떠나는 자 또는 다른 세상을 접하는 모든 초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이방인인 셈이다. 자라면서 집에만 머무르지 않고 수없이 많은 공간을 새롭게 맞이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방인은 따로 존재한다. '이방인 구분'이 어리석은 짓이란 걸 이 책이 끝날 즈음에 깨닫는다면 저자는 저술 목적을 달성한 것이리라.   


떠남, 상처, 거리, 각성의 네 가지 큰 주제로 책은 이방인을 설명한다. 대부분의 '토박이'는 '자연적 태도' 속에 빠져 있단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사회학자가 말하는 '자연적 태도'의 뜻은 의외로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안정감 때문에 모호함과 익명성 뒤에 숨어 무엇이든 의심하지 말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연적 태도는 사회가 요구하는 자세다.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고 자기 인식이 없다. 이런 태도를 인지하는 것은 오로지 이방인이다. 자연적 태도는 문제를 전혀 모르게 하여 '용감한' 행동을 유도한다. 이런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행동이 필요하다. '고인물이 썩는다', 혹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와 같은 속설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기에 우리 모두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토박이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미셸 푸코는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가 토박이 역할을 강요하는 감옥은 아닌지 의심한다. 감옥인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세상을 안락과 안식을 주는 곳으로 여긴다. 슬라보예 지젝은 진정한 자유를 모르기에 사람들이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그것은 길들여진 자유 또는 가짜 자유라고 외치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이방인이다.   


이방인이 되지 않으면 자기와 자기가 속한 집단(사회)을 알 수 없다. 자연적 태도와 문화적 유형을 의심하며 끊임없이 부유하는 모험인인 이방인은 새로운 환경, 공간, 맥락에 진지하게 접근하며, 무한한 호기심을 발휘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날선 긴장감을 감내한다. 자기 자신을 버리거나 비우는 이방인을 그리스어로는 '파로이코스', 히브리어로는 '이브림'이라 부른다. 이방인은 권태를 생리적으로 싫어하며 끝없는 변태를 시도한다. 만남이 주는 기쁨과 고통을 양손에 쥐려는 모험가인 이방인은 매번 새로운 곳에 들어가니 어리버리할 수밖에 없다. 이방인은 새로운 레시피에 허술함을 느끼면서도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이방인의 말을 듣지 ㅇ낳는 토박이는 기존 레시피를 완전하다고 느끼며 애지중지한다. '인생은 늦게 도착한 영화관 같은 것'이라는 조셉 캠벨의 말은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허상을 좇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깊이 반성하는 이방인의 눈에는 토박이가 허상에 목매달고 있음이 보인다. 토박이의 눈에 이방인은 그저 몽상가로 보일 뿐이다. 카뮈가 쓴 '이방인'의 뫼르소는 자신과 세상 모두가 서로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다운' 무관심에 의해 뫼르소는 오히려 세상을 형제같이 느끼게 된다. 이방인을 차별, 억압, 모멸, 학대, 조리돌리는 세상은 이방인을 괴물이나 광인 취급을 하는데, 이유는 자신들의 세계가 이방인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막거나 자신들의 결속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다. 세상과 이방인은 아주 미미한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및 사회적 낙인과 살인을 저지른다. 혹시라도 완전한 차이가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외계인쯤 된다면 아예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고,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게 이방인이며, 그래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가깝고도 먼 타인인 것이 이방인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광기는 드물다. 하지만 집단, 정당, 국가, 시대로 보면 광기는 상례다." - 니체('선악의 저편')


문제는 자기가 속한 사회나 집단의 광기를 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집단에서 벗어난 이방인만 볼 수 있겠죠. 니체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회나 집단은 거대한 '정신병동'과도 같을 것입니다. 이방인이 지적하는 걸 전혀 듣지 않고 외면한다면 말이지요. 


에밀 뒤르켐은 한술 더 뜹니다. 집합적으로 미쳐 있어야만 사회는 존재가 가능하다고 했으니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파트나 명문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 토박이에게 이방인은 괴물이 되어 조롱과 핍박과 박해를 당하지만, 정작 괴물은 토박이다. 이성의 마비 아닌 불면증에 걸린 이성의 과도한 활성화 때문에 괴물이 탄생한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자신들 세계를 보호하고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토박이들은 이기심을 발휘하지만, 극진한 자기애와 자기 실리 추구 결과는 자기 증오와 자기 파괴 및 자기혐오를 낳을 뿐이다. 


"낯섦이 없이 절묘한 미는 없다." - 프랜시스 베이컨


획일성과 단일성이 지배하는 곳에는 재미와 흥분이 없다. 낯섦을 허용해야 우리 삶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다. 인생은 정상과 비정상이 쌍두마차를 이루어야 의미 있는 삶이 가능하다. 낯섦과 마주하라!


이방인의 다른 말이기도 한 주변인 혹은 경계인은 오해와 핍박을 받고 애먼 공격의 표적이 되기 일쑤다. 역동적인 삶을 위해서는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자격인 동시에  '질병불각증'에서 탈출하려면 이방인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내가 국외자가 되면 내가 인간임을 알게 된다." - 브레몽토렝

"글을 쓴다는 것은 네가 고향에 없음을 아는 것이다." - 라비 알라메딘


마음을 비운 이방인은 온갖 편견에서 자유로운 까닭에 모든 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할 수 있다. 우매에서 벗어나려면 집단과 멀어져야 하는데, 그래서 저자는 '집단지성'을 싫어한단다. 의외다. 


'광야'는 고통과 괴로움을 통해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오롯이 자신과 대면하게 하여 새로운 자각을 일으키게 하는 광야에 있기 위해서는 자발적 고립에 의한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 한 장소에 오래 있는 이방인은 점점 토박이를 닮아가기에 진정한 이방인은 영원히 장소를 옮겨 다닌다. 쉼, 생각 정리, 창의성을 위해 광야로 나가야 한다.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 두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깊은 상처를 주니까 그렇다. 이방인은 거리 두기와 '밀당'의 달인이며, 천재기와 광기를 모두 소유하고 있다. 진실이나 사실보다 거짓이 더욱 통용되는 것이 우리 사회다. 거짓에 대한 배려, 하얀 거짓말, 예의 따위를 파고들다 보면 윤리와 도덕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이방인이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다. 폴 틸리히는 외로움은 홀로 있음의 고통이고 고독은 홀로 있음의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고독은 인간의 운명이고 짐이어서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거짓 사고와 행동으로 점철된 우리는 사회 속에서 고독을 외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고독을 마주해야 비로소 자신을 정화시킬 수 있는데 말이다. 니체는 고독을 모르는 인간은 노예와 같다고 했다. 존재(인간의)의 영어 단어 'existence'는 '밖에 나가 선다'(ex-sists 또는 ex-stand)라는 의미다. 손님, 임차인, 일시 체류자 따위는 모두 이방인을 뜻한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잊고 살라고 권한다. 아니, 억압한다. 오로지 소비만이 미덕이라는 자본주의는 또 어떤가. 잠을 자며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린 사람들이 어느 정도 깨우치는 순간이 다가오면 곧 죽음이 닥친다. 사회적 드라마라는 것을 눈치채는 이는 제3자 시점을 가진 이방인이다. 이방인은 사회가 드라마 혹은 코미디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 안에는 수많은 타인이 존재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하는 노래 가사도 있다. 결국 타인을 빼면 나의 존재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아이와 노인이 이방인의 전형이라고 하는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도시에 사는 노인들도 이방인인가? 그들은 대개 세상의 각박함과 매정함을 파악하고 자식들에게 요령껏 살라고 가르친다. 농촌이나 어촌 혹은 산촌에 사는 노인들은 좀 다르다. 그들은 평생을 자연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연법'을 잘 알고 그에 따른 인간의 삶의 의미나 정도를 인식한다. 빌딩이나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시에 사는 노인들에게 인생의 통찰을 바라는 건 무리가 아닐까. 


견유학파였던 디오게네스의 세상 초월처럼 이방인 역시 비슷한 능력이 있다. 이방인은 프로그램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알고리즘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액체 같은 유연성 그 자체인 이방인은 거짓과 기만의 시대정신을 따르지 않고 거부한다. 이방인처럼 항상 깨어 있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불면증과 고독이라는 고통을 동반한다. 세상의 허망함을 아는 이방인은 될 수 있으면 좁은 문으로 가려 한다. 그 누구보다 내면이 강한 이방인이 갈망하는 것은 그가 떠나온 고향이다. 고향은 이방인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지만 고향에 돌아가서는 또다시 이방인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나온 세월 탓에 결코 토박이와 어울리거나 동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고향은 어디인가? 저자는 미래를 고향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곳이 타향이기에 고향 떠난 원죄를 품고 미래를 고향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사회학은 인문학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철학과 사상, 윤리와 도덕,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문학 등을 아우르는 사회학이 우리는 모두 이방인임을 선포하고,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길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다. 이방인은 인간의 본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 등 여러 가지 의문은 남는다. 거시적인 방향을 잡았다면 미시적인 방향은, 총론을 알았다면 각론은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가. 이 한 권으로 다시 한 번 사회학의 폭과 깊이를 경험했다는 것으로 일단은 만족한다. 사회학 공부, 이게 끝은 아니니까...  




작가의 이전글 <서평> - '이명현의 별 헤는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