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안녕] 7. 엄마는 언제가 행복했어?
"웃으세요."
라고 했나 보다. 사진 속의 엄마는 턱을 당긴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직된 미소를 짓고 있다.
귀엽다.
언제 찍었던 사진인가?
아, 여권을 만들려고 찍었던 사진이구나.
70 평생 해외여행 한 번 간 적 없는 엄마가,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여권을 만들겠다고 찍은 사진이었다.
"우리나라에 좋은 데가 얼마나 많은데 돈 들여서 그런데를 가?"
오빠가 유럽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시골에서 자란 엄마는 글을 배우지 못했다. 어릴 때 가난한 것은 아니었고,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나이 차이가 있는 외삼촌이 가장 역할을 했었는데, 외삼촌은 여자가 글을 배워 뭐에 쓰냐는 생각을 갖고 계셨었고, 엄마한테 학교도, 야학도 못 가게 했었다고 했다. 외삼촌 몰래 야학을 갔다가 들키면 혼이 났었고, 동네의 다른 친구는 야학에 갔다가 들켜서 머리카락이 잘리기도 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더 이상 배우지 못했고, 늘 못 배운 것이 한이라며, 글을 배웠으면 이렇게는 살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는 했었다. 일을 시작함에 거침이 없었고, 안 되는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았던 엄마는 진짜 글을 배웠으면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면서 더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을 잘 쓸 줄 몰랐던 엄마는 관공서나 은행, 큰 병원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셨었다. 그래서 되도록 가지 않으려고 했고, 가야 한다면 늘 내가 같이 가주길 바랐지만, 난 내 소소한 일정에 정신이 팔려 엄마의 요구를 자주 잊어버렸고, 엄마가 두세 번은 더 말을 해야 은행업무를 봐주거나 관공서에 가서 일처리를 하고는 했었다. 엄마는 그러는 내가 치사하기도 했을 것이고, 혼자 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고, 여권을 신청하려고 구청까지 갔던 것을 보면 엄마도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 하셨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해외여행을 가지 못했다. 여권 사진을 찍고 얼마 안 돼서 엄마는 일을 하다가 넘어져서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허리에 전해지고 말았다. 한동안 엄마는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를 해야 했고, 해외여행 얘기는 유야무야 사라졌었다.
아프다는 것을 알기 전, 엄마는 갑자기 자신의 사진을 찾았었다. 난 엄마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이 없었다.
"엄마 서랍에 있지 않아?"
"이거 말고도 있었던 거 같은데."
"모르겠는데?"
그리고 난 잊어버렸었다.
그 후, 엄마 유품을 정리하다가 엄마가 찾던 사진들을 발견했다. 앨범에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앨범을 구석에 처박아 놓고 잊고 지냈었다.
찾아봐 줄 걸.
다시 또 마음 한편에 돌덩이 하나 얹어 놓은 듯 무거워졌다.
엄마의 사진을 봤다.
엄마의 사진 속에는 내가 함께 했으나 잊힌 시간의 엄마도 있었고, 내가 모르던 시간 속의 엄마도 있었다.
엄마 고희 기념으로 갔던 제주 가족여행, 오빠가 모시고 갔던 경주여행, 엄마 친구분들과 함께 했던 여행들. 대체로 여행이나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그중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 정도에 집에서 찍은 사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모두 3장의 사진인데, 엄마랑 오빠가 함께 찍은 사진이 1장, 언니와 나, 엄마가 함께 찍은 사진이 2장이었다. 아직 아빠가 살아계셨을 때인 듯한데, 아빠는 집에 안 계셨던 모양이었다. 아빠가 계셨으면 사진 같은 건 찍지 못했을 테니까. 오빠랑 찍은 사진에서 엄마는 오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엄마, 언니,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은 엄마가 가운데 앉고 양 옆으로 언니와 내가 앉아 있다. 엄마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언니가 엄마 왼쪽에서 팔짱을 끼고 찍었는데, 한 장은 셋 다 정면을 보고 있고, 다른 한 장은 셋이 활짝 웃고 있다. 엄마가 언니를 향해 웃고 있는 것을 보면 언니가 웃긴 얘기를 했던가 보다. 다른 사진 속 엄마는 대체로 얌전하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체 무표정하거나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었는데, 이 사진만 크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좋기도 하고 짠하게도 느껴졌다.
몇 년 전 언니한테 "행복해?" 하고 질문을 했었는데, 언니는 형부를 만나서 행복하다고 했었다. 동화 속 단어로 느껴지던 그 말이 언니 입에서 나오자, 너무 낯설기도 했지만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언니가 부럽기도 했었다. 그래서 작년 혹은 재작년 즈음에 엄마한테 물어봤었다.
"엄마는 언제가 행복했어?"
하는 질문에 엄마는
"행복은 무슨, 먹고살기 힘든데, 행복이 뭐야, 행복이."
라고 말했었다.
아, 그렇지. 엄마가 살아온 세월을 내가 봤는데, 엄마한테 그런 질문을 하다니......
난 질문한 것을 후회했었다.
그러다가 엄마의 사진을 보면서 다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진 속 어느 순간에도 행복한 적은 없었던 걸까?
질문이 잘못됐나?
"엄마는 언제가 행복했어?"
말고,
"엄마는 행복한 적이 있었어?"
라고 물어봤으면 대답을 들을 수 있었을까?
난 엄마랑 콩나물밥을 해서 양념장에 비벼 먹을 때 행복했었어요.
엄마가 나한테 뭐 먹고 싶냐고 묻고 맛있는 것을 해줄 때도 행복했었어요.
어릴 때 돈 없어서 못 사줬던 과일을 철철이 사다 주면서 먹으라고 할 때도 행복했었어요.
사람들한테 엄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었다고 자랑하고, 사람들이 부럽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 난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었어요.
어릴 때 못 받은 사랑을 최근 몇 년 원 없이 받았던 거 같아서 행복했었어요.
엄마가 허송세월 그만 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더는 막지 않아 줘서 고마웠었어요. 나는 그 일을 하면서 좌절도 많이 했지만, 행복한 순간도 있었어요.
나 어릴 때, 엄마가 아빠랑 이혼하려고 할 때, 엄마가 날 버리고 갈까 너무 두려웠는데, 그 힘겨운 시간을 참고 끝까지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어요.
역시 어릴 때, 술 취한 아빠가 무서워서 매일매일 버스정류장에서 엄마를 기다리면, 버스에서 내려서 차가운 내 손을 엄마 손으로 따뜻하게 데워주면서 집으로 같이 돌아와 줘서 고마웠어요.
난 엄마 덕분에 행복한 순간이 꽤 있었어요.
엄마한테 전하지 못한 말들이다.
길게 땋아 댕기를 드린 앳된 엄마 사진도 있었다. 엄마는 19살 내지 20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앞으로의 고생 같은 것은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가서 엄마한테 말해주고 싶다.
아빠가 지금은 돈을 잘 벌고 잘생겼지만, 아빠랑 결혼하지 말아요. 아빠는 한번 실패했다고 주저앉아 버리는 바보 같은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싫은 소리 못하면서 가족들한테만 큰소리치는 못난 사람이에요. 매일 술만 마시고, 엄마를 때릴 거예요. 그러니 제발 도망가세요. 결혼하지 마세요.
그러면 엄마가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한 순간을 말할 수 있을까?
작년 엄마는 희수였다. 77세.
형부는 엄마가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지 못했다고 해서 해외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11월이 엄마 생일이니, 11월 말쯤에 가는 것으로 계획하고 표도 예약했지만, 11월 말 엄마는 폐암말기 진단을 받아서 해외여행은 역시 가지 못했다.
귀엽게 찍은 증명사진이 붙은 엄마의 여권은 만들고 나서 한 번도 쓰이지 못했다. 용기를 내서 구청에 가서 만들었던 여권은 끝내 서랍 속에만 남게 되었다.
아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갔으면, 사위와 함께 해외여행을 갔으면 행복한 순간이 만들어졌을까? 그럼 언제 행복했어?라는 나의 질문에도 엄마가 대답을 해주실 수 있을까?
고생만 하다가 간 엄마한테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주지 못한 막내딸의 뒤늦은, 집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