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맏며느리 탈출!

by 나봄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던 출국일이 드디어 돌아왔다.
석 달 전, 딸아이의 해외 학회 참석이 결정되었다.
“엄마, 이번 기회에 유럽 가자! 명절 연휴까지 더하면 일정도 길고 여유롭잖아.”
“아이고야, 지금 백수에 돈도 없고, 명절에 다들 오는데 어딜 가냐.”

“엄마, 일 안 할 때 가는 거야… 지금이 기회야. 가자.”
아이 말에 술렁이긴 했으나,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편이 휴가를 낼 수 있을지도 문제고, 내가 실직 상태라 경제적으로도 빠듯하지만, 내 친구 은행이 해결해 줄 것이다.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 내가 누군가? 큰 집의 맏며느리다. 작년에 명절 제사를 없앴다 해도 가족 모임으로 대체했기에, 우리 집으로 모이는 건 마찬가지다. 우리가 여행 가면 다들 적적해할 텐데. 명절이 다가오면 “형님, 저희 몇 시에 갈까요? 점심 주세요.” 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전화하는 사촌 동서, 특히 어머니는 더 적적해 하실 텐데. 하지만 이번 아니면 언제 가겠냐 싶어 양가에 양해를 구하고 유럽 여행을 감행했다.

16박 19일, 인생 최장 여행이다.

아침부터 청소기와 걸레질로 집안 곳곳을 정리한다. 혹시나 집안을 둘러보러 오실 친정 아빠의 폭풍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지만, 여행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 깔끔한 집으로의 입성과 너저분한 집으로의 입성이 여행 후 피로 해소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다. 여행 전 청소는 나의 루틴이 되었다.

물론, 서장훈급 깔끔이 아빠의 성에는 차지 않을 것이 분명하더라도.


세탁기를 돌려놓고 20분 거리의 친정 집으로 간다.

해외 나갈 때마다 출국 전 마지막 식사는 항상 엄마의 집밥이다. 한동안 한식을 마주하지 못할 자식들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이다.
“아이고, 우리 새끼들! 준비는 다 한 거야?”

“아, 새벽까지 짐 정리하느라 잠 못 잤어!”
“아이고, 고생했다. 얼른 앉아라.”
엄마의 식탁은 어디부터 손이 가야 할지 모를 정도로 한가득 차려져 있다. 오늘의 메뉴는 갈비탕, 육개장, 병어구이, 머위나물 등 정성 가득한 밥상이다.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을 엄마의 모습에 마음이 찡하다. 하지만 아침부터 진이 빠진 난, 밥을 물에 말아 조개젓을 올려 한 숟갈 먹어본다. 나이 들어 많이 먹지 못하는 것도 속상한데, 입맛도 없다.
“우리 똑똑이, 떨리지 않아?”

“할머니, 하나도 안 떨려. 수천 번 연습해서 안 보고도 줄줄 말이 나와.”

“그럼, 누구 손녀딸인데, 우리 똑똑이는 항상 잘하지.”

손녀딸의 등을 토닥거리며 대견해하는 엄마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엄마는 길치인 내가 걱정인가 보다.
“엄마, 잘 챙겨라. 엄마 길 잃지 않게 손 잘 잡고 다녀.” 엄마에겐 오십이 넘은 딸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와 캐리어를 들고 나간다. 52년 내 인생 첫 명절 여행이다. 게다가 첫 유럽 여행이라 그런지 걱정보단 설렘과 기대가 더 크다. 그래서일까, 지하철로 공항 가는 길이 가볍게 느껴진다.

은행 다니는 동생이 “언니, 환율 1,600원대 유럽 여행 가기 쉽지 않은데, 대단해.”라며 엄지척 해줬었다. 몰라서 용감했던 거다.

공항에 도착해서 실수의 연속이었다. 검색대 상자에 짐만 넣고 벨트에 밀어놓지 않고 혼자 나오는 실수, 출국수속 시 여권을 잘못 놓는 실수… 처음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그래도 괜찮다. 두 시간 후면 난 유럽을 향해 가니까. 처음으로 공항 라운지도 이용하게 될 거다. 그것만으로 이번 여행은 설렌다.

내 인생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어떤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