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불은 장작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살아가는 과정들은 불과 같은 용기가 자주 필요했다. 장작의 여부를 선별할 여유는 우리에게 허락될 겨를이 없었다. 용기가 기쁨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좌절의 늪으로 안내하곤 했다.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느냐, 그저 나대는 사람으로 판단되느냐는 용기의 결과에 의한 미세한 차이였다.
누구에게나 삶의 첫 시작은 공평하지 않았고, 공평할 수 없는 삶의 연속이었기에 작거나 커다란 용기만으로 버텨내야 했다. 그러한 과정들은 때로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용기를 내야 했고, 가끔은 용기를 내기 위한 많은 숙고의 시간도 필요했다.
너무도 가난한 환경에서의 결혼은 과감한 용기가 필요했다. 서로가 판단할 겨를 없이 사랑만을 생각하는 어린 나이이어야 했다. 사랑만을 생각하는 결혼은 그 끝이 어디에 도달할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커다란 용기만이 남아 있었다. 그로 인해 네 명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앞 뒤를 재지 않는 용기에 의한 결과이었다. 네 명의 아이를 양육하면서 과감한 용기의 결과에 충분히 책임을 져야만 했다. 양쪽 집안 어른들의 도움을 받고 평가하면서 진정한 나의 위치를 알게 되곤 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감사했던 나의 어머니는 손주들의 양육에 관해서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매우 엄격하였다. 어머니가 이토록 계산적이고 본인을 끔찍이 사랑하셔서 어떤 희생도 거부할 줄은 십 대를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건 나의 어머니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짝의 어머니도 손주들의 양육 부담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시고 목소리가 커져 나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희생과 배려만을 보여주는 존경의 부모님의 아이콘은 나는 아직 만나 보지 못했고, 현재까지도 나의 주변의 맞벌이들의 영원한 고충사항이었다. 유치원, 어린이집, 돌봄 선생님, 아주머니 등에게 나의 아이들은 신속하게 적응하면서 자라났다.
이러한 자식 욕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버지는 형제가 일곱 남매였다. 할아버지는 부인이 세명이었다. 형제들은 같은 어머니의 친족끼리 끈끈하였다. 첫째 할머니에게 홀로 태어난 아버지는 늘 외로움을 호소하셨고, 형제간의 갈등도 많았다. 아버지의 무능력함에 우리는 삼촌, 고모, 조카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결국,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학교에 출석을 하였다. 심난한 상황을 아이들에게 들키기 싫은 어머니의 영민함 덕분이었다. 수업을 받고 있는데 학교 운동장 너머 보이는 산등성이로 할아버지의 상여가 올라가고 있었다. 국민학교 3학년이라 생각이 깊지는 않았지만, 첫 손주인 내가 할어버지 상여 앞에 서지 않는 것이 조금 의문이었다. 내가 태어난 시골에서는 대개 첫 손주가 상여 앞에 사진을 들곤 하였다. 친구가 물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산소 보러 안 가?” 나는 대답했다. ”몰라.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랑 안 친해 “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나는 자식 욕심이 많았다. 우글 우글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지내고 싶은 욕심이었다. 기저귀와 분유값에 허덕이면서도 다툼 없는 아이들의 웃음이 너무 좋았다. 어쩌면 잠 못 들고 울어대던 아이들의 함성이 나를 빨리 철들게 하였다.
군대를 다녀오고 막막하였다. 병장시절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집안 사정은 대학을 복학할만한 사정이 아니었다. 늦게 다녀온 군대는 나의 이십 대 중반을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동대문시장의 비닐봉지 배달과 편의점에서 밤을 꼬빡 새우면서도 나는 언제가 무언가는 해 낼 것이라는 용기가 필요했다. 멀티미디어의 세상이 열린다면서 CD 타이틀 작업을 배우면 평생 안정된 직업이 보장된다는 말에 용기를 내어 나의 수입의 절반을 내면서 컴퓨터 그래픽 학원을 다녔다. 미술을 배운 적이 없는 내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지 밤을 꼬박 새워 학원비를 벌고 낮에는 학원을 다니면서 치열한 제대 군인의 삶을 살았다. 군생활 동안, 내가 소속된 중대 역사상 처음으로 병장을 조기 진급하는 등 군에서의 수많은 포상 수여로 인해 나의 용기와 자신감은 내 생애 최고의 시절이었다. 다행히 같이 학원을 다니던 사람 중에 제일 먼저 취업을 하게 되었다. 328번 버스를 타고 충무로 인쇄골묵 뒤편의 작은 회사로 첫 출근하던 두근거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회사 문을 밀어재끼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물론, 면접 볼 때의 용기에 비하면 훨씬 작은 용기이었지만 기쁨만이 기득 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작은 월급이었다. 배우고 익히는 시절로 만족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무언가를 고민하고 기존의 광고물들을 참고하면서 최종적으로 결과물이 되어 나올 때의 쾌감과 만족감은 작은 월급과 바꾸기에 충분하였다. IMF가 다가왔다. 또 용기가 필요한 시절이 급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을 잘 보낸 용기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기억될까? 잘못된 용기가 너무도 많았다. 잘못된 용기의 시절은 차가워진 바람과 함께 내 기억 속에서 날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내딛는 한 걸음이다. 작은 용기 하나가 삶의 방향을 바꾸고, 스스로를 믿게 만든다. 살아가면서 용기를 냈던 순간들을 기억하게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용기를 저축할 수는 없을까? 실수할 것 같은 용기, 아쉬워할 것 같은 용기는 저축해 놓았다가 꼭 필요할 때 용기의 히어로처럼 커다랗게 모아서 꺼내 사용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