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핸드폰이 진동을 한다. 시도 때도 없다. 노인의 이기주의는 자식에 대한 배려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삶이 끝나가고 있음에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보상받고 싶다는 마음부터 앞선다. 가난을 대물림한 자식은 노인에게 모든 일과를 집중할 수는 없다. 어렵게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은 자식은 사회에서 짓누르는 효도라는 익숙한 단어의 실천을 위해 노인에게도 시간을 할애하려 하지만 노인은 양이 차지 않는다. 노인은 본인이 희생한 젊음에 대한 억울함과 편안해 보이는 자식의 삶이 감사하면서도 질투가 앞선다. 노인을 잊은 것 같아서 자꾸 자식의 핸드폰 번호를 누른다. 노인이 늙어가고 삶이 마무리될 것 같은 시간이 가까웠다고 느낄수록 새벽에도 한 밤중에도, 자식이 일하는 시간이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노인으로 인해 한숨이 늘어가는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불공정한 세상을 원망한다.
노인은 나이가 들어 자식을 보고 싶다는 표현을 특이하게 한다. "도둑이 들어와서 사탕 한 개를 가져갔어" "전자렌즈가 혼자 켜진다" "세탁기가 작동이 안 된다" 휴일엔 곁에 있어달라는 소리를 이런 식으로 전한다. 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직도 자존심이 상한다. 항상 야단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던 노인의 입장에서는 자식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다. 노인은 “너 없어도 살아. 난 까딱없어. 난 항상 혼자였어. 언제부터 그리 잘했다고 유세야 “라고 항상 혼자 되풀이한다. 하지만 또 자식의 핸드폰을 누르고 있다. 할 말이 없다. 워낙 살가울 틈을 주지 않았다. ”오늘 며칠이야? 내 연금 나오는 날인가? “ 반복하여 물어본다. 보고 싶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에는 익숙하지 않다. 자식은 숨이 막힌다. 휴일은 쉬고 싶고 밀린 집안일도 있으며 나름의 미루어둔 약속도 있다. 효심으로 측은한 마음을 더해 모든 일을 희생하고 보답해야 할까? 착하게 포기하고 노인만 바라봐야 하나? 순간, 자식은 노인이 어깨 위를 짓누르는 느낌을 받는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월급을 받으면서부터 노인이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가난한 노인을 챙기다 보면 월급은 잠깐 머물다 떠나는 간이역 같은 느낌이었다.
무섭기만 했던 노인에게 이제는 화를 낸다. 화가 난다. 그러나 노인에게 향한다. 운명 같은 휴일이다. 열아홉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어렵게 학교를 다녔다. 그때부터 노인에게 은혜를 갚는 경제적 보상이 시작되었다. 처음 노인에게 아르바이트 시급을 건네면서 참으로 행복했었다. 어느덧 노인을 봉양한 시간도 사십여 년이 넘어간다. 지친다.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와 나의 관습이 노인을 포기할 순 없다. 노인의 전화가 오면 배우자와 자식들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짐을 해 본다. 나는 이런 노인이 되지 않아야 할터인데.
늙어간다, 노인만 늙는 것이 아니라 자식도 늙어간다. 소통이 활발한 시대에 살다 보니 노인들끼리 자식을 비교한다. 자식들끼리는 노인을 비교한다. 경제적인 효도가 으뜸 효도인 것처럼 비추어진다.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효도가 아름다운 것을 모두 알면서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날씨가 추워지면 잠바를 사 드리고 주말이 되면 단백질이라는 고기를 사 드리기 위해 맛집을 검색한다. 노인은 맛 판정단처럼 맛있는 음식에는 감사하지만 검소하고 맛없는 형편없는 음식에는 입을 대지 않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가끔은 노인의 친구들 사이에 자랑질을 할 수 있도록 과일이나 빵 등을 사서 돌린다.
노인이 되어간다. 앞서가는 노인을 사랑하고 효도하기보다는 답답해하고 고단해하면서도 어느덧 뒷따라 노인이 되어간다. 배려하고 자식에게 도움이 되는 노인이 되어야 할터인데 원망하는 한 자리를 차지하진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