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어렸을 때, 내가 군대를 다녀오기 전에 20살의 겨울, 나는 광진구 자취방을 뛰쳐나왔다. 목적지는 해남 땅끝마을이었다. 등산복에 가방 하나 메고 그냥 걸었다. 계속 걸었다. 오는 전화는 모두 받지 않다가, 중간에 아버지의 전화를 한번 받았다.
지금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도저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서일까.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몰라서였을까. 도대체 20살의 나이에 뭐가 그렇게 무겁고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뭐가 그렇게 괴로웠을까?
나는 모든 사람들이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고 믿는다. 전문직 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사실 직감적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던져지는 작은 조언 하나하나는 매우 소중하지만, 치명적이다. 삶의 위기에 부닥쳐 내면이 닳고 닳아 여려진 이들은 어딘가 자신이 기대야 할 대상을 찾는다. 그것이 때로는 사람이기도 하고, 종교이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은 대게 우리가 의식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자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제든지 다시금 빠져나올 수 있는 구석이 있다.
‘아, 내가 지금 힘들어서 ’ 종교‘에 기대려 하는구나. ’ 사람‘에 기대려 하는구나.’
하지만, 조언이라는 형태로서 전달되는 이 레퍼런스는 상당히 위험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은밀하게 스며,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사고를 점차 잠식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굳게 믿던 신념들의 배신은 그렇게 시작된다. 신념들이 나의 진짜 목소리와 제대로 뒤섞여 한 몸이 되어 버리면, 뭐가 내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그것들에 세뇌당해 버린다.
우리의 안에서 출발한 철학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내밀하게 흘러들어온 것들이 나를 자꾸만 방해하고 간섭하려들 때. 뭐가 진짜 내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될 때.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항상 패배한다. 우리가 직감하고 있는 바를 무시하고, 다른 길을 간다.
자취방에서 걸어 나온 나의 발걸음은, 패배에 저항하는 몸부림이었던 거다. 내가 나로서 살고 싶다는 나의 의지였으며, 내 직감이 미래를 향해 외치는 명료한 신호였다.
도대체 20살의 나이에 뭐가 그렇게 무겁고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뭐가 그렇게 괴로웠을까? 그때의 나는 내가 참고할만한 레퍼런스가 적어도 내 주변에는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자가. 도저히.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해야 했다. 2015년 겨울 20살에 광진구 자취방을 나와 해남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던 그 순간조차도. 그렇게나 특별한 문제없이 잘 성장해 온 어린 청춘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니. 이해까진 아니어도 그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니.
아버지의 물음은 어리석었다.
난 부모님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짚고 넘어갈 것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당신들은 잘 못 산 게 분명하다.
도대체 이 세상 어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배우면서 사는가? 적어도 내 가족과 친구 어떤 누구에게도 나의 행동에서 그 어떤 질문과 영감 혹은 위로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참으로 실망스럽다.
당신들은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살지 않는 것인가?
적어도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 보여서. 그게 외로웠다. 그래서 나의 내면이 외치는 질문을 도저히 세상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냥 있어 보이는 뭔가를 위해서가 아니고. 진정 자신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내가 잘못된 삶을 사는구나 싶어서. 외로웠다. 혼자이고 싶었다.
14일간 혼자 걸어 결국 끝끝내 해남 땅끝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그런 행위 속에 뭔가 특별한 교훈이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수행하던 석가모니가 마침내 열반에 이르렀듯이, 그런 육체적 괴로움 속에 나의 내면에 어떠한 깨달음의 광명이 번뜩하고 전해져 다시 한번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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