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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Dec 03. 2021

사진 구경 3  

여인숙旅人宿  추억

내 세대에게 '여인숙'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추억의 이름이다.

통행금지 시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에게 여인숙은 단순히 '숙박시설'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술추렴으로 늦은 밤, 집은 먼데 대중교통이 끊어지면 친구 자취방이 아니면 도리 없이 여인숙 신세를 져야 했다. 호주머니가 가벼운 사람에게는 여인숙이 여관보다는 저렴해서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새벽 4시까지

잠깐 눈을 붙이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장소였다. 대학교 때 연극반에서 얼쩡거릴 무렵이다. 연습기간이나 공연기간에는 집에 들어가는 날이 드물었다. 학교 연습실에서 자거나 아슬아슬한 시각일 때는 집까지

가보려는 시도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여인숙 신세를 지곤 했다. 우리들끼리는 '인숙이네 집'이라고 부르던 여인숙에서.....


여인숙에 얽힌 추억이 두 개 있다. 가을 공연을 앞두고 연습이 한창인 때였다.

가끔 와서 지도를 해주던 연극인 선배 한 분과 연습이 끝난 뒤 저녁식사 겸 술 한 잔을 하다가 시간이

늦어져서 행촌동의 한 여인숙에 들어가게 되었다.

체격이 왜소하고 깡마른 그 선배는 밥은 거의 먹지를 않고 술만 마셨는데 그것도 '깡소주'만 마셨다.

이미 어지간히 취해 있던 상태였는데 여인숙에 들어가서도 사 가지고 간 소주를 또 마셨다.

그 선배는 술주정 같은 건 없었지만, 술 마실 때 일종의 기벽奇癖 같은 게 있었다.

여인숙에서 둘 만의 자리가 되면 '삼각팬티' 하나만 입은 차림으로 술을 마셨다.

그 볼 품 없는 왜소한 몸매, 더구나 팬티 하나만 걸친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는 아는 것이 많았다.

연극을 시작으로 문학과 철학을 종횡무진으로 오가는 그의 박학에 당시 나는 넋이 빠져 있었다.

그날도 깡소주에 '명강의'를 들은 후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주위가 소란해서 잠이 깼는데 옆의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방을 나가 보니 불이 환하고 여인숙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선배도 있었다.

어떤 중년 남녀가 선배를 호되게 몰아세우고 있었고 여인숙 주인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상황을 알아보니 이랬다. 밤에 소변이 마려웠던 선배가 화장실을 찾아 방을 나왔는데 복도가 깜깜한 데다 술이 덜 깬 상태라 복도 끝의 어느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냥 소변을 본 모양이었다.

그 결과는 짐작이 갈 만한 일이고 그래서 그런 소동이 벌어진 것이었다.

결국 신고를 받은 경찰관에 이끌려 인근 파출소로 가게 되었다.

나는 서둘러 선배의 옷을 챙겨서 파출소로 따라갔다. 파출소로 연행된 선배를 본 경찰관들의 표정이

어땠겠는가? '좀도둑이나 양아치' 대하듯 야단을 치고 겁을 주었다.

그런데 이에 응수하는 선배의 말이 걸작이었다. 오래전 일이라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통금 때문에 들어온 사람, 술 취한 사람, 지방에서 온 사람 등이 이용하는 장소로서의

여인숙 용도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술 취한 사람이 밤중에 화장실을 가는 건 당연한 일,

그렇다면 복도에 불을 켜 놓던지, 아니면 밤새도록 카운터에서 안내를 해주던지, 하는 게 주인의 의무가 아니 나며 조목조목 따지는 것이었다.

말인즉슨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지라 경찰은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아무 곳에나 실례를 하면 되느냐'며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몇 마디 하고는, 다른 경찰관에게 '이 분 다시 데려다주라'라고 했다.

여인숙에 돌아와서는 다시 남은 술을 마시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적잖이 긴장했던 나는 그 선배를 무슨 소설의 주인공 바라보듯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선배와는 대학을 졸업하고 몇 번 만난 후에는 소식이 끊어졌다.

행촌동을 지날 때나 누군가에게서 그의 이름을 들을 때는 늘 그날 여인숙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그가 그립다.


그해 초여름이던가, 고등학교 동창 하나와 춘천에 간 적이 있었다.

내가 편지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춘천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전에 예고도 없이 간 것이었다. 종강이 임박한 학교로 찾아가 그 친구를 만나고자 했지만 마침 그날

그 친구는 수업이 없어 허탕을 치고 말았다. 요즈음 같이 휴대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찾아낼 길은 막막했다. 겨우 왕복 차비만 마련해서 간 것이라 별 수 없이 당일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춘천 시내를 돌아다니다 강가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공지천이었던 것 같다.

마침 저녁 안개가 자욱하게 낀 강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둘은 풍경에 취해 말없이 강둑에 앉아

강만 바라보다 기차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닫고는 부랴부랴 역으로 갔지만 이미 마지막 기차가 떠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역 근처의 여인숙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저녁도 굶은 채 서울 갈 차비를 숙박비로 낸 우리는 밤늦도록 서로 다투었다.

준비 없는 즉흥적인 여행을 서로 나무라고 서울로 갈 차비 마련은 어쩔 것인지 짜증을 냈다.

배는 고프고 몸은 피곤하고, 둘은 아침에 여인숙을 나롤 때까지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다음날 서울로 갈 차비를 구하느라 겪은 우여곡절을 열거할 생각은 없다.

50년을 같이 지내온, 나와는 가장 가까운 친구라  그와는 지금도 그때 이야길 

'그래,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하며 그리운 추억으로 되돌아보곤 한다.

  



청운동 사진 위주 갤러리 '류가헌'에서 이강산의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주제는 '여인숙'이었다. 여인숙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그의 사진전을 보러 갔다.

이상한 외국 이름을 단 숙박업소는 많지만 이제 우리 주변에서 여인숙을 보기는 어렵다.

사라져 가는 여인숙에 대해 '낭만'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분명 어떤 그리음 같은 감정을 가지고 그의 사진전을 보러 갔다. 그런데 전시장 안에 들어서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예전의 그 여인숙이 아니었다.

여전히 여인숙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지만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하루나 이틀 밤을 묵는 '여행객'이

아니었다. 오갈 데 없는 '고단한' 사람들이 한 평도 안 되는 쪽방에서 한 달, 두 달, 길게는 일 년, 이 년을 붙박이로 '거주하는 집'이었다. 사진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삶의 막다른 골목까지 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딱 한 장을 제하고는 전시된 사진에 대한 촬영은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전시장 입구에 게시된 설명문을 읽어보았다. 작가는 자신을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불러주기를 바랐다.

여인숙 사진은 2007년에 처음 흑백 필름에 담은 뒤 14년간을 촬영해 왔다고 쓰여 있다.

작가는 여인숙 사진을 찍어온 배경으로 '우리 사회의 어떤 진실을 드러내는 데 있다'라고 했다.

전시장에 나와 계신 작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이 같은 사진을 찍게 되었느냐는 '상투적인

질문'에 작가는 자신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일제 말기 징용 피해 등 어려운 삶을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 시장市場의 모습과 사람들에 대한 기억 등을 그 배경으로 말했다.

여인숙 사진을 찍기 위해서 실제로 그곳에서 '달방 - 월 일정액을 지불하고 지내는 것 - 생활을 길게는

1년이나 하면서 그곳 사람들과 같이 소통하며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경력을 보니 저자는 시집과 소설집을

여러 권 낸 문학인이기도 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사람들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것 같았다.

전시장 테이블 한쪽에 여인숙 사진 195점이 수록된 그의 사진집이 놓여 있었다.

초판이 나오기도 전에 재판까지 찍는 호조를 보였다고 한다. 그의 사진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좌일 것이다. 사진집은 가격이 많이 부담된다. 선뜻 사기가 어려웠다.

전시장을 나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 옛날 기억에 남아 있는 여인숙과 전시회에서 본모습이 너무 다른 것이 그랬고, 사진집 한 권 사지 못한 내 마음 또한 그랬다.


<지난 10월 말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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