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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Dec 06. 2021

다시 쓰는 일기 3 – 2021. 12. X

큰딸과 함께 보낸 하루

지방에서 살고 있는 큰딸이 사진전을 보러 서울에 왔다. 지방이라지만 KTX를 타고 오면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딸아이를 만나 전시회가 열리는 ‘그라운드 시소 서촌’으로 갔다. <요시고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내게는 생소한 사진가였다. 전시장에 가보니 끝이 보이지 않게 줄이 늘어서 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사진작가인 모양이었다. 딸아이는 사전에 예약을 해 놓았지만 나는 그냥 따라온 것이라 현장 구매를 해야 했다. 꽁무니에 줄을 섰다. 매표소를 향해 거리를 줄여나가는데 입구 쪽에서 안내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표를 구매하면 3시간 후에 입장이 가능하단다. 전시 중인 사진이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아 선뜻 끌리지 않고 있던 나로서는 ‘차라리 잘됐다’ 하는 심정이었다. 딸아이도 그렇게까지 기다리기는 무리라고 생각했을 테고, 그렇다고 저 혼자 구경할 수도 없는 일이라 구경을 포기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인근에 이름난 맛집이 있다며 나를 그리로 데리고 갔다. 파스타 집이었다.

아담한 집이었다.


         

2년 남짓 블로그를 하고 있던 내게 ‘브런치’를 소개해 준 건 큰딸이었다. 내가 쓰는 글이 브런치에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블로그에 쓴 내 글을 한, 두 개 외에는 읽은 적이 거의 없었지만(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가끔 대화를 통해서 내가 어떤 식의 글을 쓰고 있는지 짐작은 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나는 블로그에 올리는 글을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자연히 나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이나 주변 이야기를 소재로 많이 이용했다(내 나이에 그런 이야기 빼면 쓸 게 뭐가 있겠는가). 내 아이디를 알고 있는 사람은 두, 셋에 불과하다. 가족을 비롯해서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블로그를 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아내는 가끔 불평을 한다. 알려주질 않기 때문이다. 방문객을 늘리고 조회 수를 늘리려면 주변 지인들에게 많이 알릴수록 좋은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블로그의 어느 대목에 묻어 있을 ‘내 속살’을 나를 아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 소심한 성격 때문일까?      



브런치를 소개해 준 뒤로 처음 만난 큰딸이, 내 글이 ‘너무 개인적인 사실을 드러내는 것 같다’고 했다. 처음 가입할 때부터 관여했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디를 알고 있었을 딸아이가 일종의 모니터링을 해주려고 살펴본 모양이다. 사실 몇 개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여러 번 읽고 또 읽으며 고치기도 하고 고민도 했다. 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여과 없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하지만 글이라는 게 결국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표현 수단인데 그런 제약을 느끼게 되면 진실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유명한 비평가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특출함이 없는 사람들의 유일힌 피난처는 정직함뿐'이라고. 그게 아니라면 글의 소재나 성격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딸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나로서는 네가 내 글을 읽는다는 것도 부담일 수 있다. 그걸 의식하면 나는 아무래도 내용에 가감을 하거나 숨기려고 할 것이다”. 딸아이도 그 말에 공감을 한다. 글이라는 게 상식적인 규범을 어기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어서도 안 되겠지만, 자신을 속이거나 감추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대화도 이어졌다. 대화라기보다는 내 한탄 같은 것이다. 행위 위주의 글, 그러니까 ’오늘 어딜 갔다. 누굴 만났다. 무슨 이야기를 했다. 무얼 봤다‘ 등등 초등학생 일기 같은 글을 쓰고 싶지는 않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사색이 빈약하고 바탕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게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내공이 쌓여야 가능한 것인데 이제 와서 한탄해본들 어쩌겠는가. 결국 결론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다가 식당을 나왔다.           



요시노 사진전 구경을 못한 대신 서촌 근방을 산보하기로 했다. 라 카페 갤러리에서 박노해 시인의 글·사진전 <걷는 독서전>을 구경하고 엽서 몇 장을 샀다. 사색에 젖게 하는 사진과 짧은 글 한 두 줄이, 쫓기듯 허덕이며 바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개관 8주년 기념 전시가 열리고 있는 박노수 종로구립미술관에 들러서는 오래된 가옥의 안방과 거실과 다락과 주방에 자연스럽게 걸어 놓은 화가의 그림들을 구경했다. 청색의 장엄한 산과 황금색 대지, 그 속에 함께하는 사람과 동물이 평화롭고 따스한 고향의 정서를 불러오고,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원초적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전시실을 나와 집 주변을 돌아본다. 옷 벗은 나무들, 기묘한 모양의 수석과 돌조각들, 빨간색 금붕어가 노니는 작은 연못 등이 제 자리를 지키며 내방객을 맞고 있다. 정갈한 정원을 어루만지는 초겨울 오후 햇살이 따사롭다. 가차 시간에 여유가 있어 국립 민속박물관에 들러 최근에 출토된 조선시대 활자 전시를 구경한 후 딸아이를 용산역까지 배웅했다.



저녁 식사 후에 세스 노터봄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읽었다.  며칠  손에 잡고 있는 책이다.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다.  쪽  쪽을 음미하며 읽으려고 애쓴다. 밤에만 읽다 보니 속도가 더디다. 눈은 침침하고 금방 피로가 온다. 평생에 이런 여행기   쓰고 죽는다면 소원이 없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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