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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Dec 10. 2021

삶은 땅콩

그리운 막내 삼촌

4·19가 나던 해 2학기에 서울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가족 모두가 이사를 한 건 아니었고 나 혼자만 유학(?)을 온 것이다. 그게 가능했던 건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한 막내 삼촌이 자취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명륜동에서였는데 지대가 꽤 높았던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만 있을 뿐 구체적인 풍경은 떠오르지 않는다. 삼촌은 친구와 방 하나에서 같이 지냈다. 거기에 나까지 끼어들게 된 것이다. 학교는 걸어서도 갈 만한 거리에 있었다. 당시는 초등학교(국민학교) 수준 차이가 심해서 학교들 사이의 서열이 공공연하게 정해져 있던 시대였다. 상위 4∼5개 학교가 경기, 서울 등 소위 5대 명문 공립중학교에 대규모로 입학했다. 내가 전학 온 학교도 그 안에 드는 학교였다.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였다. 물론 가난한 집 아이들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복도에서 당시 식모라고 불리던 가사도우미들이 도시락과 보온병을 들고 기다렸다. 가난한 집 아이들 가운데는 자신이 가져온 도시락을 펼쳐 놓는 게 부끄러워 학교 뒷산에 가서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의식이 없던 나도 차츰 그 아이들에 섞여서 뒷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 주눅이 들어 있던 참이기도 했다. 삼촌은 여러 조카들 가운데에도 특히 나를 많이 귀여워했다. 지방 도시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주기적으로 소년 잡지와 아동 만화, 동화책을 사서 보내 주었다. 아마 나를 서울로 전학하게 한 것도 삼촌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불러온 나를 삼촌 나름으로는 정성을 다해 보살폈을 것이다. 도시락에도 신경을 써서 김이나 멸치볶음 같은 반찬을 만들어 주었다. 시골의 내 아버지가 자주 밑반찬을 날라 주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반의 부유한 아이들의 도시락과는 너무 차이가 있어 그 아이들과 섞여서 밥 먹기를 꺼리고 비슷한 집 아이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는 행동이었다. 1년 정도를 그렇게 삼촌과 자취 생활을 한 후 우리 가족이 서울로 이사해 오면서 따로 살게 되었다. 



5형제 중 막내인 삼촌은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5형제 중 공부도 가장 잘했다. 법학을 전공한 삼촌은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은행에 취직했다. 당시는 은행 들어가기가 여간 어려운 때가 아니었다. 아침에 집 앞 감나무에서 까치가 여러 번 울길래 '무슨 좋은 소식이 있으려나'하고 생각했는데, 그날 삼촌이 은행 합격 소식을 전해 왔다고 생전의 할머니는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삼촌은 글씨를 잘 썼다. 신입행원 시절에도 글씨 덕분에 서무 담당을 했고 군에서도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그 큰 덩치에도 자상한 성격이었다. 나와 내 동생 등 우리 식구들 사진을 한데 모아 앨범을 만들어 주었는데 앨범에 'ㅇㅇ의 자라나는 모습'이라는 제목 밑에 몇 살 때 어디서, 무슨 날에 찍은 것이라는 표기를 해서 붙였다. 그런 앨범이 두 권이었는데 이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분실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 앨범에 담긴 사진들과 삼촌의 글씨가 선명히 기억난다. 삼촌은 결혼하기 전 반년쯤을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다. 그런 연고이다 보니 내 모친은 세 시동생 중에서 막내 삼촌과 가장 정이 많이 들었고 - 모친이 시집왔을 때 삼촌은 세 살이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그 삼촌에게 정신적으로도 많이 의존했다. 삼촌은 법학을 전공했지만 문학을 좋아했다. 시 습작을 하기도 했다. 자신이 지은 습작시를 조카들 앞에서 읽어주기도 했다. 삼촌에게는 책이 많았다. 법률이나 금융 관련 책들도 있었지만 평론집이나 에세이집 등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어령의 『어느 일몰의 시각엔가』라는 수필집과 전혜린의 수필집, 5권으로 된 『월탄 삼국지』 등이 기억에 남아 있다. 역사소설을 즐겨 읽은 조모를 위해서도 책을 많이 사 드렸다. 아침에 화장실에 갈 때는 꼭 책을 들고 갔다.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오래여서 재촉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삼촌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나는 가끔 삼촌에게 용돈을 얻으러 갔다. 특히 대학에 다닐 때 그랬다. 당시 삼촌은 C은행 본점에 근무할 때였다. 내가 찾아가서 채 말을 못 꺼내고 쭈뼛뿌뼛하면 휴게실로 데리고 가서 지갑에 있는 돈을 털어서 주었다. 못마땅해하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나는 그때 내가 얼마나 철없는 행동을 했던가 많은 후회를 했다. 머리가 다 큰 놈이 형편이 어려우면 요즘 식으로 알바를 하던지 해서 스스로 해결해야 했었다. 연극합네, 문학합네 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다니면서 너무 안이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삼촌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을 때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회사 생활에 대해 자상하게 물어보고 직장인의 마음자세 같은 것을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조언해 주었다. 삼촌이 일본에서 지점장 생활을 할 때 공교롭게도 나 역시 일본 주재 근무를 하게 되어 비록 지역은 달랐지만 같은 나라 안에 있다는 마음에 늘 대견해했다. 가족들 생일이나 제삿날에는 작은 선물이나 안부를 전해주었다. 어머니를 본인이 계신 오사카로 오게 해서 열흘 넘게 구경을 시켜드리기도 했다. 



삼촌은 식성이 까다로운 편이었다. 까다롭다기보다 특별히 선호하는 음식들이 있었다. 명태와 양미리를 좋아했는데 달달하게 묻혀서 고추장을 발라 구운 명태와 고추장과 된장 양념을 발라 석쇠에 바싹 구운 양미리를 좋아했다. 젓가락을 대면 겉이 부서질 정도로 바싹 구워야 했다. 멸치 고추장볶음을 좋아했고 간고등어를 좋아했다. 삶은 땅콩도 좋아했다. 아마 자랄 때 모친(내 조모)이 자주 만들어 주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삼촌은 우리 나이로 쉰넷에 돌아가셨다. 둘째 형님인 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본인 나름으로는 늘 건강에 주의를 기울였다. 건강 감진을 철저하게 했고 담배도 일찍 끊었다. 하지만 술을 끊지는 않았다. 사교 상 필요도 했겠지만 워낙 술을 좋아했다. 아마 수명을 단축한 원인 중의 하나가 술이 아닐까 생각된다. 은행에서 촉망받는 간부직원이었고 대인 관계가 좋아 출세 전망이 밝았는데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에서 귀국하기 전 건강검진 과정에서 병이 발견되어 서둘러 수술을 한 뒤 귀국했지만 1년가량 병원과 집을 오가며 투병 생활을 했다. 내 아내가 몇 번 삶은 땅콩을 가져다 드렸는데 아주 맛나게 드셨다. 병상에 계실 때 미국 출장을 다녀온 내가 문안을 가자 이것저것 물으시며 당신의 출장 경험을 말씀하시기도 했다. 나는 대학 다닐 때 몇 개의 가명을 동원하여 독자 투고를 해서 여러 달 동안 새로 나온 월간지를 받아 보는 짓을 했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삼촌이 그때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삼촌이 세상을 떠난 뒤 나는 자주 삼촌 꿈을 꾸었다. 가만히 나를 불러 용돈을 주시거나, 불러도 아무 대답 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지치고 힘들었을 때 꿈에서 삼촌을 본 날은 왠지 편안하고 희망적인 마음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꿈에서 삼촌을 보는 게 뜸해졌다. 아마 이제 만날 날이 그리 먼 훗날의 일이 아니어서일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삼촌이 그립다. 삶은 땅콩을 먹을 때면 특히 더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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