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부쩍 더워졌다. 6월의 날씨가 이렇다면 한여름을 어떻게 견딜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아내와 매일 하던 동네 산책도 패턴이 바뀌었다. 전에는 하루는 동네 야산을 오르고 또 하루는 공원 산책을 하는 식이었는데, 요즘은 산에 오르는 건 포기하고 공원 산책만 다닌다. 산이라야 높이가 100m도 되지 않는 언덕 수준이지만 ‘정상’에 오르는 계단은 중간에 한두 번은 쉬어야 할 만큼 길고 가파르며, 제법 오르막내리막이 있는 산 둘레를 한 바퀴 돌고 오면 소요 시간은 1시간 남짓이지만 숨이 찰 정도의 운동량은 된다. 이런 더운 날씨에 산에 오르기는 아무래도 체력이 달려서 평탄한 공원길만 도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시간도 선선한 저녁 식사 후로 바꿨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오면 대개 1시간 20분쯤 걸린다. 운동 패턴이 바뀌면서 우리 부부의 산책 모습(?)도 변한 것 같다. 우선 말이 많이 줄었다. 전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집에서보다 오히려 산책길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산책 기회를 통해 미뤄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는 모양새였다. 집안 이야기, 모임이나 경조사에 다녀온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옛날 회사 다닐 때 이야기 등. 그런데 요즈음은 그냥 묵묵히 걷다가 돌아오는 날이 대부분이다. 밝은 대낮과 어두컴컴한 저녁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그런 결과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1시간 남짓의 시간이지만 말없이 걷기만 하면 지루하고 힘이 더 든다. 같은 거리라도 대화하면서 걷다 보면 어느새 여기까지 왔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체감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걷는 사람 중엔 귀에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나 음악을 들으며 걷는 사람이 많다. 우리 부부의 산책길에 이야기가 줄어든 건 우선 내 탓이라고 해야겠다. 그동안 이야기의 실마리는 주로 내가 꺼냈기 때문이다. 그 마중물 이야기를 화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차츰 말을 꺼내는 게 꺼려졌다. 낮과 저녁이라는 시간변화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보다도 내가 하는 말의 소통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아마 그전부터 느껴오던 ‘불만’이 산책 시간이 바뀐 것을 기화로 불거져 나온 게 아닌가 싶다. 그동안의 대화 과정에서 나는 내가 하는 말의 전달력에 대해서 회의가 드는 때가 많았다. 아내와의 관계에 특별히 문제가 생겨서가 아니었다. 가장 많은 대화 상대이니 사실 당연한 일이다.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그런 불안과 불만은 ‘있었겠지만’ 대개는 그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이 예민하진 않았기에(아마 상대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기에) 소통에 대한 생각을 심각하게 하진 않았다. 단지 아내는 내 이야기의 어떤 대목을 두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비판과 질책을 했을 뿐이다. 특히나 어떤 ‘사실’이 아닌 내 ‘생각’을 말했을 때 뜻밖의 반응이 나올 때 당황해진 적이 많았다. 서로 간의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가 있다. 이게 옳고 저게 그르다고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는. 또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듣고 보니 그 지적이 옳은 것이라는 걸 깨닫기도 한다. 문제는 ‘내가 말하고자 한 건 그게 아니었는데’ 하는 당혹감을 느낀 경우다. 그 경우 중언부언 몇 마디를 보태서 내 본의를 전해보려 하지만 이야기가 꼬이고 이상하게 번져가는 사례를 몇 번 겪으면서 나는 차츰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처음 한동안은 말없이 걷기만 하는 시간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못해 또 한두 가지 이야기들을 꺼냈다가 다시 소통 부족에 부딪치는 사례가 몇 번 계속되다가 요즈음은 대체로 그냥 걷기만 한다. 이는 내 소통 능력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내도 그런 소통의 어려움을 느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아내의 말에 대해 다소 생각이 다르더라도 가능한 한 그냥 들으려고 한다. 그에 대한 반박(의견)이 다시 소통 부족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는 아내대로 역시 자신의 말에 대한 내 반응이 불만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소통 부족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다. 우선은 소통 ‘능력의 부족’이다. 말주변이 부족하거나(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말하는 태도가 옳지 않거나(자기 말만 하고 듣지는 않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려는 노력 부족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말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용하는 단어에 대해 서로 생각하는 개념 정의가 다르거나 이야기의 바탕에 있는 가치관의 차이 같은 것 말이다. 말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많은 사상가들이 탐구해 온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감당할 문제는 아닌 것 같고 또 내 이야기가 그런 수준의 이야기도 아니어서 이쯤에서 접기로 한다. 아무튼 요즈음 나는 말의 어려움을 느끼면서 침묵도 소통의 한 방법으로 이런 침묵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침묵이 ‘그냥 말없음이 아니라 또 다른 소통 방법’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과제이겠다. 하기야 소통에 대한 생각도 저마다 각각인 것 같다. 예전 재직 시 어느 부서장은 한 달에 한 번 ‘소통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직원들과 만나는 시간을 만들었는데 그 시간 내내 자기 혼자만 ‘일장연설’을 한 경우도 있었으니 소통이라는 개념 또한 저마다 각각이긴 하다. 누구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아 그래도 말을 해야 알지, 말 안 하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 오해도 대화를 통해서 풀리는 것 아니야?’ 하고. 그 말도 맞는 것 같은데. 아, 참 어렵다. 말이라는 게.
중앙SUNDAY에 실린 유승도 시인의 시 「침묵」과, 그에 대한 박준 시인의 짧은 사색의 글을 읽으며 다시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시 「침묵」은 이렇다.
솔바람 속에 내가 있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려하지 않았으므로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도 않았다
골짜기 외딴집 툇마루에 앉아 한 아낙이 부쳐주는
파전과 호박전을 씹으며 산등성이 너머에서 십년 묵
언에 들어가 있다는 한 사람을 생각했으나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바람 속에 내가 있었으므로 바람의 처음과 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박준 시인은 ‘때때로 우리는 달변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며 ‘흙탕물을 받아두듯 어느 정도의 침묵이 있어야 나와 상대의 마음이 선명하게 보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