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리

by 청효당

회사 근처의 원룸을 얻어 따로 나가 사는 막내아들은 두 달에 한 번꼴로 집에 온다. 아들이 올 때마다 아내는, 혼자 살면서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별식을 준비한다. 월남쌈이나 꽃게찜, 보쌈, 김치찌개 등 주로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번갈아 가며 만들어 준다. 이번에는 어떤 음식을 만들어 줄까, 고민하면서 아내는 가끔 내게 ‘뭐 먹고 싶은 게 없는지’ 물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대체로 ‘글쎄 뭐 별로···’가 일상이다. 사실 나는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없다(딱 하나를 빼고). TV와 유튜브에서 먹방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방송에 나오는 음식들을 보고 ‘저 집 한번 가 봤으면’, 하고 생각한 경우가 거의 없다. 가족 중 누군가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식사 자리에서도 ‘아, 이 음식 참 맛있네’ 하고 느꼈던 경우도 드물다. 인스타그램 등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집들을 고르고 고른 것이어서 수준은 어느 정도 ‘공인’된 것일 테니 음식 맛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건 내가 미식가이거나 입맛이 까다로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맛에 대한 감각이 무디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나는 결혼해서 어느 한 번 반찬 투정이나 음식에 대한 불평 같은 것을 했던 기억이 없다(이건 그저 내 기억에 그렇다는 말이지 장담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아내의 음식 솜씨가 나무랄 만하지 않았던 데에 가장 큰 이유가 있긴 했지만(생전에 어머니는 아내의 음식 솜씨에 대단히 만족했었다), 나 자신 오래도록 특별히 피하는 음식이 없이 그냥 차려주는 대로 군소리 없이 먹는 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는 말이 있듯이, 자라면서 (특히 청소년 무렵) ‘별식’이라는 걸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는 내게 미각이 발달했을 리는 없다. 애초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세 식구의 생계를 위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셨다. 나와 6살 아래 동생은 새벽에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아침밥을 같이 먹고 나는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가고 동생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방 한구석에 밀쳐놓은 밥상에는 동생이 먹을 점심이 차려져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개는 내가 저녁밥을 지었다. 어머니는 해가 지고 나서도 한참을 지나야 귀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갈 때까지(그 무렵 어머니는 장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유학 온 큰집 사촌들의 살림을 맡아서 했다) 그런 생활이었다. 어머니는 손끝이 야무지고 음식 솜씨가 좋은 분으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나는 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옛날에 어머니가 해주신 맛’이라는 말로 음식 맛을 평가한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그 음식에 대한 최고의 찬사인 셈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맛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고단한 살림이었다고 해도, ‘화려한 음식’은 아니었을망정 자라면서 어머니가 만들어 준 음식 중에 어찌 맛났던 음식이 없었겠는가. 그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와 같이 자주 먹었던 평범한 음식일 수도 있고, 무슨 날에나 먹었을 잡채와 같은 별식일 수도 있었을 터인데 왜 나는 그런 음식들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까?



그나마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의 맛이란 대개가 유년 시절의 음식들로 이제는 거의 맛볼 수 없는 음식들이다. 설사 비슷한 음식이 있을지라도 당시의 그 기억 속의 맛일 리는 없다. 설 무렵 고향에 가면 할머니가 고방(냉동실 안처럼 추웠다)에서 가져와 주시던 콩강정(경상도 방언으로는 콩인지라 했다), 된장 맛이 나던 장떡, 경상도식 탕평채, 식혜(채 썬 무와 고춧가루가 들어가는 경북 안동 지방의 설음식으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식혜와 다르다)는 고향의 음식들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다. 어머니는 식혜가 없으면 설을 쇤 것 같지 않다며 매년 설이면 빠짐없이 만들어 먹었지만, 이제는 고향에 가도 맛보기 어려운 ‘희귀한’ 음식이 되고 말았다. 코로나19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벌초와 차례를 지낸 후 고향 큰집에서 먹던 비빔밥도 빼놓을 수가 없다. 손가락 길이만큼 자란 배추 싹이 수북하게 얹힌 고슬고슬한 밥을 된장찌개와 고추장으로 비빈 후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린 비빔밥으로 여기에 간고등어를 곁들여 먹는다. 이 ‘비빔밥이 먹고 싶어 조상 성묘를 온다’고 할 정도로 모두가 좋아하는 음식이지만(‘노동’후 다 같이 둘러앉아 먹는 그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벌초도 외부에 맡기고 성묘와 차례도 제각각이어서 다시 맛볼 수가 없게 되었다. 내 입맛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유난히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대여섯 살 무렵(겨울) 동네 친척 집에 놀러 갔을 때 마침 식사 중이던 그 집 밥상에서 본 두부찌개다. 아저씨 뻘인 분이 식사 중이었는데 뜨거운 두부찌개를 후후 불어가며 먹는 모습이 얼마나 맛이 있어 보이던지 지금까지도 두부찌개만 보면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 음식이 맛있어 보여서였는지 아니면 그분의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철들어 먹은 음식 중에는 콩나물국밥이 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지방 공연이랍시고 지방 몇 군데를 다니다가 들른 전주에서였다. 전주의 콩나물국밥이 유명한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 ‘삼백집’에서 먹은 콩나물국밥은 정말 기억에 남는 맛이었다. 몇 년 전 여름휴가 때 서울로 오는 도중 전주 한옥마을에 들러 여전히 영업 중인(옛날 그곳은 아니었다) 삼백집에서 콩나물국밥을 먹었는데 그때의 (추억의) 맛은 아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정말 내게 ‘소울 음식’이라고 해야 할 음식이 있는데, 제목으로 적은 양미리다. 등이 굽은 모습이 호미 같다고 해서 내 고향에서는 ‘호메이(호미) 고기’라고 부르는 생선이다, 잘 말린 양미리에 된장과 고추장을 발라서 석쇠 위에 올려 불에 바싹 구워 먹는데 알이 통통한 놈은 그 맛이 일품이다. 아마 자랄 때 어머니가 해주셨을 텐데 결혼 이후 먹어 본 기억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결혼 후 ‘양미리 양미리 하고 하도 노래를 부르니’ 아내가 몇 번 해준 적이 있는데 요리하는 과정도 번거롭고, 또 나 이외에는 누구도 좋아하는 음식이 아닌지라 자연 먹을 기회가 없어졌다. 이즈음도 시장을 지나다 새끼줄에 매달린 양미리를 보면 입에 군침이 돌지만 ‘감히’ 살 생각은커녕, 눈길도 주지 않고 못 본 척하고 지나간다. (‘아내여 우리 언제 양미리 한 두름 사서 구워 먹읍시다’).



나는 미식가나 식도락가와는 한참 거리가 멀지만 음식에 관한 책들은 몇 권 보았다. 작가 등 문필가 중에는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예전에는) 음식 맛에 유별난 분들이 많았다. 그런 분들이 낸 책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언론인 홍승면 선생의 『백미백상百味百想』과 국문학자 최승범 선생이 지은 『풍미산책風味散策』이다. 두 책 모두 음식을 4계절로 나누고 각각의 음식에 대해 수필 형태로 쓴 것이다. 『백미백상』은 45가지의 음식을 4계절로 나누었고, 『풍미산책』은 77가지의 음식을 계절별로 나누었다. 수박과 오이, 고추, 쑥, 시금치 같은 흔한 과일과 채소부터 장어와 홍어, 명태, 뱅어, 송어회 등 생선류와, 토끼탕, 노루볶음, 쇠 혀 등 육류에 이르는 다양한 음식에 대해서 동서양의 옛 문헌 기록, 저자의 경험과 에피소드 등을 ‘맛깔나게’ 적은 글들이다. 설사 해당 음식 맛은 못 볼지라도 읽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 미식가가 된 듯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은 책이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그 시대에는 풍류가 넘치는 멋있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 두 책 말고도 소설가 황석영 선생의 책(『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도 ‘궁핍과 모자람의 조건 속에서 형성된’ 특별한 맛의 기억을 적은 인상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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