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식사 자리에서 ‘가벼운 해프닝’이 있었다. 주말에 일본어 시험을 본 둘째 딸에게 무심코 던진 질문이 가져온 파장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일본어에 관심을 가지고 취미 삼아 공부를 해 온 지는 몇 년 되었다. 딸아이는 내가 일본에 근무할 때 태어났지만 세 살 때 귀국했으니 일본어를 알고 있진 못했다. 17년이 지나 내가 다시 일본에서 (단신 부임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딸은 대학교 2학년이었다. 3년을 근무하는 동안 당시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던 막내아들을 제외하고, 큰 딸과 둘째 딸은 방학이면 일본에 와서 지냈다. 일본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맛집도 찾아다니면서 자연히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방학이 끝나고 귀국하고 나서는 다시 방학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내가 일본에서 귀국한 후로도 아이들은 거의 1년에 한 번씩은 일본 여행을 했다. 일본어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합해서 7년을 일본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나는 제법 일본어를 구사했다. 쇼핑을 한다거나 관광을 할 때에도 큰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TV 프로그램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그런 내가 부러웠던 것 같다. 둘째 딸은 언제부턴가 독학으로 틈틈이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작년에는 가장 낮은 등급의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 이번에 그 윗 단계의 일본어 시험을 보았던 것이다. 딸아이는 직장이 멀어 집까지 1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딸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식사를 하다 보니 우리 가족의 저녁 식사 시간은 대체로 8시가 넘었다. 어제도 그런 식사 자리였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딸에게 일본어 시험은 잘 보았는지 물었다. 그야말로 그냥 지나가는 말투로였다. 딸아이는 잘 보지 못했다고 했다. ‘왜? 어렵더냐?’고 물었더니 ‘공부를 안 했다’고 대답하길래 나는 ‘공부도 안 하고 시험은 왜 봤느냐?’고 했다. 힐난하는 말도 아니었고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한 것(물론 내 생각이다)이었다. 그 말을 들은 딸아이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엄마와 똑같은 말을 한다’며 곧 울음이 터질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의외의 반응에 너무 당황했다. 아마 시험을 보고 온 딸에게 아내도 같은 질문을 했고 같은 대답이 있었던 것 같다. 아내가 서둘러 ‘아빠가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건데 그게 뭐 울 일이냐?며 수습하려고 했지만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나는 몇 마디 보태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잠자코 밥만 먹었다. 딸에게 상처를 줄 만큼 내가 모진 말을 한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대학 입시나 학교 시험처럼 정해진 날자에 보지 않으면 안 될 시험‘도 아닌데 스스로 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면 다음으로 미루었다가 봐도 될 일이 아닌가’ 하는 뜻으로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혹시 내 말투에 딸을 비난하거나 나무람이 들어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아내와 이 일을 다시 이야기하면서 아내는 딸의 심정을 이해해 주려고 했다. 딸은 오래전부터 방송국의 PD를 꿈꿔왔지만 마지막 문턱까지 다가갔다가 결국은 이루지 못했다. 지금 비슷한 직종의 일을 하고 있지만 자기 일에 그다지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나이도 들어가고 장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이 더해져서 신경이 예민해진 탓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딸(꼭 둘째 딸뿐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가능하면 말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악의 없이 무심코 내뱉는 말이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연히 가족(특히 둘째 딸)과의 대화에 전보다 더 조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매일 아침, 내가 그 그룹의 일원으로 참여하(돼)고 있는 몇 개의 단톡방에는 십수 개의 글과 이미지들이 올라온다. 수신을 알리는 신호음들이 쉴 새 없이 울린다. 내용은 다양하지만 뻔한 것들이다. 계절이나 시절에 맞는 이모티콘과 이미지, 정치나 건강에 관한 유튜브 방송들, 각종 명언과 일화들, 그리고 회원들의 경조사나 모임 안내 같은 것들이다. 단톡방 운영자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메시지 가운데 경조사와 모임 안내 등을 빼고는 거의 읽지 않는다. 때로는 ‘도착 즉시’ 삭제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도 같은 작업을 반복하다가 <“반드시 숨겨라” 혀를 깨물어서라도 참아야 할 말 3가지>라는 제목의 글이 있길래 호기심이 일어 내용을 읽어보았다. ‘북울림’이라는 제목의, 아마 독서 관련 유튜브인 듯한 채널에서 만든 글이었다. ‘노년의 부모가 자녀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는 때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로 시작하는 글의 내용인데, 글에서 말하는 그 세 가지란 그 첫 번째로, ‘며느리 및 사위에 대한 속마음’으로, 이미 결혼이라는 선택을 한 자녀에게 배우자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 두 번째는 자식들을 만날 때마다 ’몸이 아프다, 이제 죽어야 한다’는 등의 습관적인 신세 한탄‘.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구는 더 자주 찾아온다. 누구는 용돈을 더 많이 준다‘ 등의 ’자식 간의 은밀한 비교‘이다. 공감이 가는 글이었다. 나 자신 아이들에게 그 같은 말을 한 적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언급된 비교의 말은 꼭 부모와 자식 간에서 뿐만 아니라 부부간에서도 종종 불화의 실마리가 되는 말인 것 같다. 친정의 누군가와, 시집의 누군가와, 친구 누구누구와, 서로가 알 만한 사람들을 예로 들어 자신들과(때로는 상대를) 비교하는 말 말이다. 문득 어디에선가 들은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비교는 내가 부족한 것, 갖지 못한 것만을 떠올린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자‘는 말이었던 것 같다. 흔히 말하듯이 말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말은 인품의 발로인가, 아니면 훈련과 수양의 결과인가? 그냥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하고 퉁치고 넘어가야 하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