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효당 Feb 07. 2022

보슬비 오는 거리

한 소년의 초상

광화문 네거리 동화면세점 앞을 지날 때면 떠오르는 기억들. 그때 그 자리엔 국제극장이 있었다. 국제극장은 한국영화를 많이 상영하던 개봉관이었다. 오전 이른 시각, 또래에 비해서 키가 작은 교복 차림의 중학생 하나가 그 앞을 얼쩡거리며 매표 시작을 기다린다. 책가방은 바닥에 닿을 듯하다. 영화 제목은 「국제 간첩」이 아니었을까 싶다. 장일호 감독에 남궁원이 주연 배우로 나오던 첩보 영화였다.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007 영화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첩보 영화들이 수도 없이 만들어지던 시절이다. 매표가 시작되고 그 중학생은 표를 사서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을 텐데 어떻게 제지도 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초등학교 6학년 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과외 공부하던 집에서 쫓겨났다. 같은 학교 친구 셋인가 넷이서 합숙하며 과외를 받던 집이었다. 중학교 입시 경쟁이 치열하던 시절이었다. 소위 명문 초등학교 아이들은 대부분 과외를 받았다. 가정교사를 두거나 나처럼 합숙형 과외가 많았다. 우리 과외 선생은 S대 학생이었는데 내 기억에 같이 사는 여자가 있었다. 결혼을 한 사이였는지 그냥 동거 중인 사이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가정 형편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밤새 집에서 만들어간 떡 등을 시장 안에서 파는 행상에 나섰다. 차츰 과외비가 밀리자 선생은 독촉이 심해졌고 급기야는 쫓겨나게 된 것이다. 집에서 가져다 놓은 이불을 담보물(?)로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숭동에서 북아현동 언덕바지의 방 두 개짜리 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동네에서 단기 과외를 받았다. 한성고등학교 근처 어디쯤이었다. 지금 북아현로로 짐작되는 길을 오간 기억은 어렴풋한데 지나다니면서 들었던 노래는 생생하다. 라디오 전파상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였는데 페티 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였다. 왜 그 노래가 유독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1차 시험에 낙방하고 2차로 들어간 학교는 집에서 아주 멀었다. 아직 전차가 다닐 때여서 전차를 타고 통학을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새벽에 나가셨고 나는 동생과 아침을 챙겨 먹은 뒤 학교로 갔다. 나는 학교생활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성격은 점점 소극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2학년이 되었다. 나는 새로 부임한 담임선생이 싫었다. 우리 반에는 은행 지점장 아들과 고급 공무원의 아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선생이 그 아이들을 편애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시절의 내 마음 풍경이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게 했을 것이다. 2학년 들어 나는 몇 번 지각한 날이 있었다. 2학년 1학기 어느 토요일이었다.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너 월요일에 지각하면 안 돼, 알았지. 만약 지각하려거든 아예 학교 오지 마.“ 했다. 물론 선생은 내게 경각심을 주려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다음 주 월요일 나는 서둘러 집을 나오느라고 했지만 제시간에 도착하기엔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학교를 향해 달려갔을 땐 이미 교문은 닫혀 있었고 운동장에서는 아침 조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토요일 담임선생이 한 말이 떠올라 도저히 학교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굳게 닫힌 교문은 내가 그 안에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것 같이 보였다. 교문 바깥에서 잠시 서 있다가 나는 시내로 나왔다. 그리곤 광화문 로터리의 국제극장 앞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국제극장을 가본 적도 없었고 광화문 근처의 지리에 밝지도 않았다. 내가 왜 뜬금없이 영화를 볼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국제극장을 떠올렸는지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아마 학교 수업을 빼먹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로 극장을 생각했던 것 같고 통학길에서 눈에 익었던 극장이어서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처음 본 영화가 「국제 간첩」이었다.      



그날부터 꼭 2주간 학교를 무단결석했다. 그리고 수도 없이 많은 영화를 보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을 맞추려면 하루 두 편 내지 세 편을 보아야 했다. 처음 며칠은 용돈으로 충당이 가능했던지 국제극장이나 아카데미 극장 같은 개봉관을 돌아다녔다. 돈을 아끼려고 아침 첫 회 상영을 보고 나서는 그냥 그 자리에 남아 2회째 상영을 다시 보기도 했다. 평일 오전이라 관객이 많지 않아 빈자리를 찾아 옮겨 앉으면 가능했다. 극장 안에서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캄캄한 실내여서 누가 볼 염려도 없었다. 그 무렵 영화 상영 막간에는 유행가가 계속 흘러나왔다. 여러 가요들이 있었겠지만 잊을 수 없는 노래가 있다.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라는 노래다. 사랑에 실패한 여인의 심정을 노래한 비감한 곡이었다. 아마도 당시의 내 쓸쓸한 심정을 그 노래에 투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노래를 들으며 울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영화 볼 돈이 떨어지자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거짓말을 해서 용돈을 받아냈다. 돈이 부족해짐에 따라 재개봉관, 동시상영관 등을 전전하며 시간을 채웠다. 처음 1주일이 지난 토요일 오후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찾아왔다. 왜 학교를 나오지 않는지 담임선생이 가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집에 일이 있어 그랬다며 다음 월요일에는 갈 거라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1주일을 보냈다. 어머니에게 학교에 내야 한다고 돈을 받아서는 영화관을 전전하는 일이 계속됐다. 그 두 주간 참 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중 팔 할이 한국영화였다. 그 나이에 영화에 대한 안목이 있을 리도 없었고 그저 스토리를 따라가면 흥미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당시 많은 수를 차지하던 대중적인 한국영화였기 때문이다. 60년대 중반은 한국영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제작되는 영화수도 많았고 장르도 다양했다. 인기 가요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또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그 주제가가 인기를 끌었다. 처음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시작한 영화보기가 어느덧 그 재미에 빠져 헤어나질 못하게 되었다. 전쟁영화, 멜로 영화, 코미디 영화, 사극 영화, 액션(일종의 한국식 느와르?)영화, 첩보영화, (당시 유행하던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마적 영화, 독립군 영화, (당시 유행하던 홍콩 무협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검객 영화, 소설 등의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이른바 문예 영화 등 장르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보러 다녔다.      



무단결석 2주째가 되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서’에 보호자로 기재된 삼촌에게 연락을 함으로써 무단결석은 어머니에게 발각되었다. 그때는 만리동 산꼭대기의 문간방 하나에 세들어 살던 때였다. 삼촌이 가신 후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에게 죽을 만큼 매를 맞았다. 방을 청소하는 나무 빗자루로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맞았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느낀 배신감은 얼마나 컸을까. 또 분노와 절망감은 얼마나 컸을까.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본인을 자책하고 한편으로는 철없는 자식을 원망하면서 탈진하여 누운 채 일어나질 못했다. 집안이 그 소동이 벌어졌으니 주인집에서 알게 된 것은 당연했다. 안채에 살던 주인집 식구들이 마당에 나와 있었고 주인아주머니는 우리 방에 들어와 말리기도 했다. 집주인에게는 삼 남매가 있었는데 막내딸이 나와 동갑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소동을 그 아이에게 보이게 된 것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월요일 아침 어머니와 함께 학교로 갔다. 어머니는 담임선생께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빌었다. 그리고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연을 비롯한 가정 사정을 설명하며 용서를 구했다.  덕분에 다행히 나는 교칙보다는 가벼운 처벌을 받고 학교를 계속 다닐  있었다. 어쩌면 영영 나락으로 떨어져 인생 낙오자로 살았을지도 모르는 사건이었다. 10 초반의  철없는 행동, 그것은 ‘대의 반항 아니고 객기도 아닌,  무엇으로도 변명할  없는, 그냥 철없는 행동일 뿐이었다.  인생에서  2주간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아 있다. 지울  없는 후회와 과오로 남아 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도 나는 한동안 방과 후면 극장가를 돌아다녔다. 회한과 더불어 영화에 대한 추억 또한 잊을  없다. 영화를 보고 마치  사연이기나  것처럼 울고 웃었다. 영화는 내게  위안이었다. 영화  삶이 비루한 현실을 잊게 해주기도 했다. 그것은 그리움으로도 남아 있다.  거기에   시절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1960년대 서울 풍경을 찍은 한영수의 작품이다.)


작가의 이전글 반성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