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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Feb 17. 2022

다시 쓰는 일기 9 - 2022.2.XX

아다지오 – 느리고 평온하게

 90년대 초 일본 주재 근무를 하고 있을 때 1년 간 단기 파견 근무를 나온 후배 직원이 있었다. 단기 파견 근무는 단신 부임이라서 주재 근무를 하는 선배 직원들 집에서 식사를 같이하거나 함께 여행을 하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정이 많이 들었다. 그 직원이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내게 준 선물이 있었다. 10여 개의 카세트테이프였는데 클래식 음악을 녹음한 것이었다. 같이 지내는 동안 그가 클래식 애호가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였기에 다소 의외였다. 테이프에는 일정한 주제로 묶어서 녹음한 곡들이 담겨 있었다. ‘아침에 들으면 좋은 음악’, ‘자기 전에 들으면 좋은 음악’, ‘오페라 아리아 모음곡’ 등의 제목에 각각의 곡명을 반듯한 글씨로 적어 놓은 목차가 함께 들어 있었다. 요즘이야 유튜브 같은 동영상 사이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형식이지만 당시는 CD나 카세트테이프가 보편적인 시대여서 그 직원은 스스로가 분류한 제목에 따라 몸소 곡들을 선정하고 녹음한 것이었다. 어지간한 애호가가 아니고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고 또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가 내게 왜 이런 선물을 했는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도 아니었고 그와 클래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엔카’를 모은 CD를 사면서 NHK 교향악단이 녹음한 클래식 음악 CD를 호기심 차원에서 한두 개 곁들여 산 적이 있지만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게는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잘 알려진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음악 몇 곡(그것도 시험에 대비하여 제목 정도) 이상의 음악 지식은 없었다. 나는 그의 선물을 아직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다. 들어본 적은 거의 없지만.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내 몹쓸 버릇 중의 하나는 예술 작품을 책을 통해 지식으로 익히려고 하는 것이다. 그림은 미술관에서 직접 보고 감상하는 것이 기본인데 해설서나 다른 사람들의 감상기를 통해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정작 해당 음악은 듣지 않고 남들(주로 문인들이나 음악비평가들)이 써 놓은 감상기나 음악 산문집 같은 것만 열심히 읽어 왔다. 예를 들면 소설가 송영(작고)의 『바흐를 좋아하세요?』나 시인 김영태의 음악 산문들 등이 그것들이다. 풍월당의 박종호 대표가 쓴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도 그중 하나다. 그런 글이라도 읽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부작용이 적지 않다. 작품과 작곡가에 대한 정보를 지식으로 무장하고 자신이 꽤나 이 방면에 밝은 것처럼 젠 제하는 못된 버릇이 쌓이기 때문이다. 물론 꼭 지식 취득만을 위해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고, 그렇게 익힌 지식을 바탕으로 실제 감상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는 지루함에 중도에서 포기하기 일쑤였다. 생초보가 처음부터 곡 선택을 잘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책에서 언급한 곡 위주로, 그것도 전 악장을 모두 듣겠다는 무모함 같은 것이 있었다. 두어 해 전까지 클래식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관심은 그 정도로 황폐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2년쯤 전부터 유튜브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조금씩 듣기 시작했다.  계기가  것은 박종호 대표가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을 다시 읽으면서였다. 다시 읽었다기보다 새로 읽었다고 해야겠다. 당시 20 정도를 읽다가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책이 발간된 것이 2004년이었으니 20 가까이 지나  책을 다시  들게  것은 윤광호의  『내가 사랑하는 생활』을 통해서였다.  책에 박종호 대표가 운영하는 클래식 음반 전문 매장인 풍월당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박종호 대표의 책에서도 풍월당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에 낯선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신과 의사이며 소문난 클래식 애호가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불현듯 다시 꺼내  것이다. 아무튼 새삼스레 펼쳐  책에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과 차이코프스키의 「플로렌스의 추억」 그리고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등을 ‘읽고  유튜브에서 해당 음악을 검색해서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졌던 클래식 음악이 뭔가 들을 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책에서 골라낸  곡들을 찾아서 저장해놓고 시간이  때마다 들었다. 송영을 비롯한 다른 분들의 책에 나오는 곡들도 들었다. 대체로 주로 감미롭고 서정적인 것들이고  알려진 악장들만을 골랐다. 시간이 기면서 제법 작곡가와 곡목들이 다양해졌다. 유튜브에는  곡을 반복해서 들을  있도록 작업한 것들이 많아  또한 작품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나 낯설게 느껴지던 클래식 음악들이 어느새 이렇게 갑자기(?) 친숙하게 다가왔는지  신기했다. 이제는 책을 읽어도  느낌이 전과 다르다. 물론 아직 연주자나 지휘자, 악단에 따른 차이와 특징을 느낀다는  꿈같은 이야기다. 이제  걷기를 시작한 초보자 수준이라고 해야 하겠다. 요즘은 매일  자기  1∼2시간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일이 낙이 되었다.      



청담동에 있는 클래식 음반 전문 매장 풍월당風月堂에 가 보았다. 처음 상호를 들었을 때는 다소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었다. 서양 클래식 음악을 취급하는 매장의 상호가 너무 비서구적(?)이었기 때문이다. ‘필’이나 ‘하모니’ (과거 6∼70년대 명동이나 종로에 있던 클래식 음악 감상실의 이름들이 대개는 그렇지 않았던가) 같은 게 아니고 ‘풍월’이라니 하는 느낌이었다. 주인의 독특한 개성이 엿보였다. 2003년에 개점한 풍월당은 2006년 청담동의 현재 장소로 이전했다고 한다. 많은 클래식 음반 매장들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던 2000년대 초반에 오히려 풍월당은 새로 매장을 열어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정신과 의사라는 분이 그 당사자여서 더욱 화제가 된 것 같다. 풍월당은 건물 4층과 5층을 사용하는데 4층이 매장이고 5층은 음악 강좌와 감상실이 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현재 5층은 운영하지 않고 있다). 클래식 음반 매장을 다녀보지 않은 나로서 다른 매장과 비교할 능력은 없다. 다만 몇 가지 인상적인 것들을 적어 본다. 우선 풍월당에서 발간한 책들이다. 무크지인 「풍월한담」을 비롯해서 박종호 대표가 쓴 『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와 같은 입문서도 있고 『브람스 평전』, 『슈베르트 평전』 같은 음악가들의 전기와 최근에 신문 서평란에서 본 적이 있는 『고전적 양식』 같은 양장본의 두툼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풍월당이 기획한 음반도 눈길을 끌었다. ‘독일 가곡 36개를 모은 음반’과 ‘옛 시대의 밤의 음반’이라고 설명지가 붙은 음반 등 기획 음반들만을 모은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풍월당의 또 하나 이색적인 특징으로 카페를 들 수 있겠다. 로젠카발리에라는 이름의 카페는 ‘1900년 경 오스트리아 빈 카페를 컨셉으로, 이제는 서울에서 사라진 클래식 음악다방’을 구현했다고 한다. 카페 역시 현재는 운영을 중지한 상태다. 다음 기회를 기대해야겠다. 풍월당은 한마디로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클래식 음악을 위한 복합 문화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동행한 딸아이에게 풍월당에 가본 인상을 물었다. 딸아이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특별한 소양이 없어 잘 모르겠다는 말 끝에 ‘참 멋있게 사는 분인 것 같다’고 했다. 박종호 대표를 두고 한 말이겠다. 나는 내가 인상적으로 들은 클래식 소품 몇 곡을 예로 들며 딸에게도 한 번 들어보라고 했다. 문득 내가 참 주제넘다는 생각을 했다. 클래식 음악 들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권유를 하는지.....     


연주할 때 빠르기를 표시하는 용어 중에서 아디지오는 ‘느리고 평온하게’ 연주하라는 말이라는데 아다지오의 기분으로 천천히 즐기면서 클래식 음악에 다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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