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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Feb 27. 2022

이어령 선생을 추모함

 내가 이어령 선생의 이름을 처음 안 것은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당시는 내 막내 삼촌과 큰 집 사촌들이 우리 식구들과 같이 살 때였다. 법학을 전공하고 은행에 취직한 막내 삼촌은 문학을 좋아했다. 시 습작도 했던 것 같다. 삼촌에게는 책이 많았다. 벽 한쪽을 차지한 책꽂이에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전공인 법률 책 몇 권을 빼면 대부분 문학 서적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책들 가운데 이어령 선생의 수필집이 있었다. 『어느 일몰의 시각엔가』라는 제목이었다. 그때 내가 그 책을 읽었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다만 그 뒷 표지는 선명히 기억난다. 아마 30대 초반 정도였을 저자의 얼굴 사진이 표지 전체를 장식하고 있었다. 안경을 낀 날카롭고 지적인 인상의 흑백 사진이었다. 이후로도 나는 이어령 선생을 생각하면 항상 그 책에 실렸던 사진이 떠올랐다.  



70년대 후반 이어령 선생이 주간으로 있던 문학잡지에 짧은 산문을 투고하여 게재된 적이 있었다. 원고지 20매 분량이었다. 원고료를 받으러 잡지사 사무실에 갔었다. 사무실은 적선동의 한옥 안에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선생을 뵈었다. 10여 년 전에 처음 본 사진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던지 정작 실제 만나 뵈었을 때의 인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선생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문학에 뜻이 있으면 그 문학잡지를 통해 데뷔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라는 말씀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마신 노란색 오렌지 주스의 기억도 선명하다. 원고료(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와 잡지사에서 출판한 책 몇 권을 받았다. 여담인데, 그때 게재된 내 산문을 계기(?)로 나는 문학 지망생을 포기했다. 활자화된 글을 읽고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진실성은 전혀 없고 오로지 잔재주만 가득했다. 그 뒤로 나는 그 글을 다시 읽은 적이 없다. 그리고 막연히 품고 있던 소설가에 대한 꿈을 포기했다. 결정적으로는 졸업 시에 논문 대신 제출할 소설 습작품을 쓰면서 ‘재주 없음’을 다시 한번 절감하고서였다.      



이어령 선생을 다시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서였다. 나는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해외 주재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  선생이 일본에 오셨다. 당시는 선생이 초대 문화부장관에서 물러난 직후였는데 전직 장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내가 선생의 입국 수속을 도와드리게 되었다. 항공기에서 내린 선생을 안내하여 입국 사열을 마치고 수하물 수취대로 모시고 갔다. 위탁수하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선생에게 오래전에  적이 있음을 말씀드렸다. 선생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그런데  여기 있지요?’라고 물으셨다. 처음에는 언뜻  질문의 뜻을 짐작하지 못해 머뭇거리다가 의미를 알아챘다. ‘문학에 뜻을 두었으면서  항공사에서 일하고 있느냐 뜻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때 나는 ‘문학을  만한 재능이 없다는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린  같다.  이상 어떤 말을 나눴는지는 기억에 없다. 잠시  선생은 수하물을 수취해서 입국장을 나와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손님과 함께 공항을 떠나셨다. 이틀 후인지 사흘 후인지 한국으로 귀국하는 선생을 다시 안내하게 되었다. 출국 수속을 도와드리고 귀빈 라운지로 안내했는데 선생은 가방에서 작은   권을 꺼내 내게 주셨다. 일본 고단샤(講談社)에서 출판된 선생의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縮み指向の日本人』의 문고본이었다.  뒷날개 안쪽에 ‘惠存 ㅇㅇㅇ樣라고  이름이 적혀 있었고  옆에 선생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날자가 1992 11 9일로 적혀 있다.  이후로 선생을 직접  일은 없다. 30 전에 받은  책은 물론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선생에 대한 글을 읽은 것은 지난 1월 24일 자 중앙일보에 실린, 선생의 댁을 방문한 한국종합예술학교 김대진 총장과의 대화 기사였다. 나는 신문에 나온 선생의 사진을 보고 많이 놀랐다. 선생이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이전에도 몇 차례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았었다. 그런데 이번에 실린 사진은 정말 초췌한 모습이었다.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모습을 가감 없이 신문에 드러낸 선생에게 경외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런 모습을 대중 앞에 드러내기를 꺼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것은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누구나 겪게 마련인 자연스러운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뜻이 그 사진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어느 글에서 ‘이어령 씨 앞에 서면 비행기 프로펠러 앞에 서는 것과 흡사하다. 하도 맹렬하고 역동적이며 지속적이어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고 하며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거인’이라고 적은 바 있다. 한 시대의 거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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