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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Mar 05. 2022

다시 쓰는 일기 10 – 2022. 3. X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봄처럼

서울생활사박물관에서 기획전시 중인 ‘서울 멋쟁이’를 구경하러 가는 길에 노원구에서 한의원을 하는 선배에게 들렀다. 46년 전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다. 일 년에 한, 두 번, 때로는 몇 년에 한 번 만날 때도 있지만 언제 만나도 푸근하고 편안하다. 오랜 시간 쌓인 정 때문일 것이다. 도중에 환자가 와서 두 번이나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코로나 이야기, 대선 이야기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선배는 메모지에 몇 가지 당부 사항을 적어준다. 모임이 있을 때 후배들에게 가끔 일러준 이야기라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평생 보약>

마음의 보약 : ⑴긍정적 ⑵능동적 ⑶낙관적

음식의 보약 : ⑴규칙적 ⑵담백하게 ⑶저녁 적게

운동의 보약 : ⑴맨손 체조 ⑵무릎 굽혔다 펴기 반복

자신이 몸소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온 탓인지 선배는 언제 보아도 혈색이 좋고 활기에 넘친다.     



서울생활사박물관은 지하철 태릉입구역에서 5분쯤 걸어가면 나온다. 이번에 검색해 보고 안 것인데 태릉泰陵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인 문정황후 윤씨의 능이다. 봉분 1기만 있는 단릉이라고 한다. 문정왕후는 중종,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인데 이야깃거리가 풍부해서 TV 드라마 소재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태릉이라고 하면 태릉선수촌이 떠오른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합숙을 하며 집중적으로 훈련을 하는 장소이다. 스포츠를 통한 국위 선양을 국가적으로 장려하던 시기의 상징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1966년에 설립한 것으로 나와 있다. 자동차에서 내린 박정희 대통령이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이곳을 방문하던 장면을 TV의 흑백 화면 뉴스로 보았던 기억이 난다. 태릉에는 배 밭이 많았다. 그 배 밭에서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다. 일종의 퍼포먼스 같은 행사였다. 결혼식은 밤에 열렸다. 당시 유행하던 마당극에서처럼 사방 네 귀퉁이에 장대를 설치하고 그 끝에 묶어 놓은 기름 솜뭉치에 불을 밝혀서 대낮같이 밝았다. 기억에 선명한 대목이 있다. 신랑의 절친인 연극배우가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핀 라이트 조명을 받으며 사뮈엘 베케트의 일인극 「마지막 테이프」를 연기하던 장면이다. 이른바 축하 공연인 셈이었다. 참 그 사람다운 결혼식이었다. 70년대 말이었거나 80년대 초였다. 예술인들 사이에 시대적 우울이나 광기 같은 것이 팽배하던 시대였다. 나 같은 꽁생원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파격적이고 기발한 축제였다.      



 서울생활사박물관은 구 북부 법조단지 부지의 기존의 법원과 검찰청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인데 2년 전 개관 직후에 와서 구경한 적이 있다. 해방 이후 서울 시민들의 생활사를 결혼 · 출산 · 교육 · 주택 · 생업 등의 주제로 분류하여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와 사진, 생활 유산과 유물 등을 전시한 곳이다. 특히 1950∼70년대를 서울에서 산 사람들에게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풍경과 풍물들을 보면서 고달팠지만 정겨웠던 지난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3.27일까지 기획전시 중인 <서울 멋쟁이>는 1950년대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패션의 역사와 변화를 보여주는 전시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명동에 양장점들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울 패션의 역사는 1960년대까지는 종래의 한복 중심의 의생활 중심에서 개량 한복과 재건복 등 신생활 재건운동과 함께 양장 착용이 강조되었고, 경제성장이 본격화된 1970∼80년대는 대학생들이 청년문화와 패션을 주도했다. 장발과 청바지, 미니스커트가 유행했던 시기다. 1981년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면서는 의복의 색채가 화려해지고 액세서리가 다양해졌다. 1983년 교복 자율화는 영 패션 시장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서울 올림픽 개최와 여가 생활 중시 풍조로 스포츠 웨어와 레저 용품이 들어왔다. 1990년대에는 서태지 등의 영향으로 X세대 패션과 힙합 패션이 생겨났다.

 1990년대는 특색 있는 패션 중심지들이 생겨난 시대이기도 하다. 명동은 10∼20대 중심의 패션 본거지로서, 압구정과 청담동은 고급 패션 중심으로, 동대문은 도매시장과 국제적인 쇼핑 명소로서, 이대와 홍대 등은  대학가의 특성이 반영된 지역으로 패션 타운을 형성했다.  

 전시는 이런 시대적 변화와 지역적 패션 공간에 대한 설명, 통계와 더불어 당시 유행하던 실물 의상, 사진과 영상, 지도, 포스터 등 다양한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어 서울 패션의 역사와 흐름을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1950∼60년대 패션 유행 스타일을 찍은 한영수와 신상우의 흑백 사진들, 1961년에 제작된 명동 일대 지도 원본 등 귀중한 자료들이 돋보였다. 1970년대 음악다방의 모습과 영화 포스터, 레코드 재킷과 잡지, 잡지를 통해서 본 시대별 패션 흐름 등도 좋은 볼거리였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군용 야전 점퍼, 목둘레가 빳빳해서 불편했던 검은색 교복, 얼룩무늬의 교련복, 나팔바지, 장발 단속에 걸려 머리 깎이던 일, 고등학생이면서도 사복이 많았던 동갑내기 사촌이 부러웠던 기억 등 ·····.     



 집에 와서 김영태 시인의 산문집 『징검다리』에 실린 어느 글을 읽다가 가슴이 뭉클했다. 시인이 일간지에 연재한 시인 44명의  해설을 책으로 엮으면서  제목을 『장판지 위에 사이다  병』이라고 했는데, 그런 제목이 붙은 사연을 알고서였다. 30   대전에 가는 길에 평소 ’성님으로 모시던 박용래 선생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단칸방 장판지 위에 엎드려 글쓰시던 선생이 반갑다고 맨발로 뛰쳐나오셨다. 조산원이었던 부인은 부재중이었다. 얼마  선생이 없어졌다. 동구 밖까지 가서 사이다  병을  오셨다. 그때 일이 동기가 되어 그런  제목이 부쳐졌다는 것이다. 『장판지 위에 사이다  병』의  뒷날개에  ’시는 장판지 위에 놓여 있는 사이다  병처럼 체면과 형식을 지운 자리에 오롯이 들어앉는다 말에서 시인이  제목을 고집한 이유를 엿볼  있을  같다.  산문집에는 정초 선배 문인 댁으로 새배 가던 , 붓으로  친필 연하장 이야기  이제는 보기 어려운 풍속들이 적혀 있다. 사람의 향기라고 할까 고결한 멋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남아 있던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는 글들이다. 김영태 시인은 15 전에 세상을 떠났다. 새삼 그의 시집과 산문집, 인물 소묘집들을 들쳐보며 평생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다  진정한 멋쟁이를 떠올려 본다.       


<지난주 KBS의 「한국인의 밥상」 끝날 즈음에 최불암 씨가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봄처럼 언젠가 우리네 삶에도 밝고 따뜻한 날이 오겠지' 라는 멘트가 가슴에 와닿아 소제목으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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