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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Nov 22. 2021

운현궁의 봄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고종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이 살던 집이다. 이름이 이재황(일명 명복)인 고종이 임금이 된 12살까지 살았다. 운현雲峴은 '구름재'란 뜻으로 이곳에 서운관書雲觀 - 관상감의 별칭 -이 있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고종 즉위 후 운현궁으로 칭해졌다.

대원군은 이 집을 무대로 10여 년간 섭정을 했다. 현재 사적 257호로 지정되어 있는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던 때에 비해서는 많이 축소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부 공간이 매각되고 흩어진 가운데 새로 중수된 세 건물과 부속 행랑채를 합해 운현궁으로 부른다.



1820년에 태어나서 1898년에 세상을 떠난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현손이자 사도세자의 증손인 왕족이었다. 똑똑하고 야심에 찬 사람이었지만, 당시 세도가인 안동 김 씨 일족의 눈을 속이기 위해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온갖 추태를 부리고 다니며 '상갓집 개'처럼 행동했다. 당시는 안동 김 씨 일족이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 왕의 외척으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조선조 말기 부패한 사회 현실의 원인이 되었다. 안동 김 씨 일족은 왕실 가족 중에 똑똑한 인물은 사전에 제거하고, 자신들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 임금으로 삼았다. 현종이 스물셋의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하자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원범으로 왕위를 잇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소설 등에서 '강화도령'으로 불린 임금이다. 이들 김 씨 일족의 뒤를 받쳐준 실권자가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조비 김 씨였다. 임금이 후사 없이 승하한 뒤의 모든 결정권은 대왕대비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도령 철종이 꼭두각시 임금으로 12년간 재위하다 역시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역사는 뒤바뀐다. 그때는 김 씨 세력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대왕대비 김 씨가 세상을 떠난 뒤라 권력은 익종(추존) 비이자 현종의 친모인 조 대비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인 대왕대비 김 씨 밑에서 기를 펴지 못하던 조 대비는 철종의 다음 임금으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이재황을 정한 것이다. 이분이 고종이다. 물론 이런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흥선군은 조대비와 치밀한 계획을 짜 왔다. 한편으로는 술주정뱅이 망나니짓으로 김 씨 일문의 눈을 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 대비의 조카인 조성하를 매개로 하여 조 대비 처소를 드나들면서 아들을 왕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계획을 착착 진행시켜 온 것이다. 고종이 명민하다는 평판과 대원군의 치밀한 계획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조 대비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복궁에 가면 자경전慈慶殿이 있다. 이 자경전은 고종이 특별히 조 대비를 위해 지은 전각이다.



대원군은 그 파란만장한 생애와 독특한 개성, 역사적인 의미 등으로 소설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소설 두 편을 들어보면, 그 첫 째가 김동인이 쓴 『운현궁의 봄』이다. 1933년 발표된 이 소설은 25개의 장으로 나눠져 있는데 고종 즉위 전, 그러니까 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이전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대원군을 보는 시각이 긍정적이다. 이즈음 소설 못지않게 성격 묘사도 치밀하고 이야기 전개도 박진감이 있다. 또 한 편은 유주현의 『대원군』이다. 『운현궁의 봄』이 한 권으로 된 소설임에 비해은 『대원군』 은 다섯 권짜리로 긴 소설이다. 집권 전뿐만 아니라 집권 후의 대원군까지 다루고 있다. 두 소설의 공통부분인 대원군 집권 전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 것일 테니 당연하겠지만, 줄거리가 비슷하고 디테일만 다소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김동인의 소설에서는 대원군의 정인情人으로 나오는 기생 이름이 계월인데 『대원군』에서는 추선으로 나온다. 실제로 대원군과 정분을 나눈 기생이 있었는지, 누구였는지, 그런 기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허구적인 인물일 것이다. 「장 씨 일가」의 작가 유주현은 『대원군』을 비롯, 『조선총독부』, 『皇女』 등 역사소설을 많이 썼다. 김동인도 『大首陽』이나 『젊은 그들』같은 역사소설을 다수 썼다.

유주현의 『대원군』은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1968년에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나도 그 영화를 보았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거의 기억에 없으나 신영균의 연기 장면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1968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고, 1969년 청룡영화상에서는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상대역인 추선 역은 김지미였다. 신영균은 「연산군」과 함께 이 영화로 사극 배우로서 뛰어난 연기력을 평가받았다.



현재의 운현궁은 세 채의 건물과 부속채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고 마당가에 기획전시관과 유물전시관이 있다.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편에 위치한 긴 행랑이 수직사守直司라고 운현궁을 지키던 수하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정문에서 마주 보이는 건물이 노안당老安堂이다. 노락당老樂堂과 함께 고종 1년에 지은 것이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으로 사랑채에 해당한다. 노안당은 『논어』의 「공야장公冶長」 편에 나오는 문구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정면 6칸에 측면 2칸 건물이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창살 문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6년(고종 3년) 고종과 민비가 가례嘉禮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진다. 안채에 해당하는 이로당二老堂은 1869년에 건축된 것이다. 고종 내외가 운현궁 방문 시 노락당을 거처로 사용하게 되어 안채를 새로 건립했다.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 민 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로당 뒤편에 영락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의 가옥으로 되어 있다.

운현궁 동쪽으로 양관洋館이 높이 보인다. 1915년 완공된 서양식 건물인데 덕성학원 소유로 되어 있다. 이 건물 조성으로 운현궁 수십 칸이 훼절되어 영역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운현궁은 한때는 창덕궁과 연결되는 고종 전용의 경근문과 흥선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있었다. 흥선대원군 사후 운현궁은 아들 이재면에서 손자 이준용으로 상속되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상당 부분 매각되어 규모가 크게 줄었다.



운현궁 부근 어딘가에 실험극장 소극장이 있었다. 70년대 후반 자주 드나들던 곳이다. 「에쿠우스」와 「아일랜드」 같은 실험극장 연극들을 보았었다. 극단 세대의 「생일 파티」(헤롤드 핀터 작)도 보았다. 지금은 그 위치가 어디쯤이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왜 나는 사라진 곳들만 자꾸 찾고 있는지....

운현궁을 나와 창덕궁 돈화문을 향해 걸었다. 이십 년 가까이 모진 세월을 보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임금 자리에 오르는 아들 고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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