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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Nov 22. 2021

『변경』을 읽고

이문열의 대하소설 『변경』은 12권으로 되어 있다. 마을도서관에서 다른 책들과 함께 한 달에 두, 세 권씩 빌려와 읽다 보니 다 읽는 데 넉 달 남짓 걸렸다. 책 뒷날개에 적힌 글을 보면, 저자가 이 소설을 완성하는 데 28년이 걸렸다고 하니 그 오랜 세월에 걸쳐 쓴 소설을 오히려 너무 짧은 기간 단숨에(?) 읽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변경』은 일종의 자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의 소설들 가운데는 비교적 자전적 성격이 강한 것이 많은데 - 하기야 어느 작가의 작품이든 자전적 요소가 없는 게 아니겠지만 -, 「  영웅시대 」나 「젊은 날의 초상 」 같은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게 아닌가 싶다. 『변경』은 훨씬 더 많은 자전적 사실을 토대로 창작된 작품으로 여겨진다. 소설은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한국 사회의 격변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인철 - 아마 저자 자신일 - 을 비롯, 인철의 형인 명훈과 누나인 영희, 동생인 옥경, 그리고 어머니 등 가족 다섯 명의 곡절 많은 삶을 다루고 있다. 인철의 집은 부유한 영남 양반 봉건 지주 출신이나 아버지의 월북으로 몰락한 집안이다.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동 속에서 아버지의 월북 이후 이 가족이 겪게 되는 고난이 소설의 핵심 줄거리다.



소설은 1959년 봄, 인철 4남매 중 인철과 누이동생 옥경이 어머니와 함께 살 길을 찾아 친지가 사는 밀양으로 가는 기차 안 풍경으로부터 시작해서 10여 년 뒤인 1972년 10월, 월북한 아버지와 비명에 세상을 떠난 명훈, 대학 친구 한 형, 그리고 첫사랑인 명혜를 수신자로 한 인철의 네 통의 편지로 끝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959년 초에서 1972년 말은 한국 사회가 통과한 격변의 시대로 요약할 수 있겠다.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한일회담,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월남 파병. 10월 유신 등 길지 않은 기간에 숨 가쁘게 전개된 굵직한 사건들은 한국 현대사의 압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철네 가족이 헤쳐나가는  삶의 양상은 이 시기 한국 사회를 집약해서 파악할 수 있는 몇 가지 현상을 대표한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첫째로는 인철의 형 명훈의 삶으로 상징되는 것인데, 50년대 말 정치와 결탁된 주먹세계의 실상, 고향 돌내골에서의 농지 개간 사업을 통해 드러나는 농촌 현실. 그리고 후반부에 잠깐 비치는 프롤레타리아 저항 운동 등을 통한 도시 변두리 계층의 빈민화 실태 등을 들 수 있겠고, 둘째로 누나 영희로 대변되는, 급속한 산업화와 계층 변동에 따른 성풍속의 변화, 광주대단지 사태를 둘러싼 부동산 투기 등에서 드러나는 천민자본주의,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 비해 다루어진 비중이 크진 않지만 - 당시 나이를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 막내 옥경의 공원工員 생활을 통해서 잠깐 엿보이는 산업 노동의 실태들이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 주인공이라 할 인철이 대표하는 세계는, 미 · 소 양 강대국 사이의 구조적 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변경' 국가의 지식인로서의 고뇌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부친의 경력에서 연유하는 원죄의식과 변경 의식이 그의 사고와 세계관 형성에 낀친 영향은 소설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편지들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고시 준비를 포기하고 문학의 길로 나아갈 결심을 내비치는 대목에서 프롤레타리아와 천민 자본가, 양 극단으로 치닫기 쉬운 이 두 기본 계급을 비판하며 양 계급을 조정하는 중간 계급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문학을 그 중요한 역할의 하나로 간주하는 듯한 대목이 그렇다.



12권짜리 대하소설이라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서는 그 내용의 무게감이 약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주요 등장인물의 수가 많지 않은 데에서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이야기 구조가 단순한 데서 연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게 이 소설이 남다르게 읽힌 이유 중 하나를 꼽는다면,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된 경상도 마을이 내 고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풍속과 지리와 정서, 그리고 방언이 너무 익숙해서 특별한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소설 제8권에 나오는, 명훈네 일가가 개간을 포기하고 서울로 떠나기로 했을 때 마을 사람들, 특히 닭실 아지뱀과 진규 아버지 같은 사람들과의 이별 장면은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유교적 윤리에 충실한 전통 사회의 미덕이 십분 발휘되는 일종의 낭만적 분위기가 이 작가가 보여주는 진면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의 다른 작품 『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네 남매의 어머니로 억척같은 의지와 강인함, 그리고 양반 계급의 자존심으로 험한 시간을 헤쳐나가는 어머니의 강한 개성 또한 소설에 활력을 주고 있다.  다섯 가족 중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형 명훈이다.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로 좋은 재능을 가졌지만 역사의 물결에 떠밀려 다니며 불안정한 삶을 살다가 비명으로 삶을 마감하는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다.



소설의 배경이 된 시대,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는 나 자신 서울에 처음 올라와 청소년기를 보낸 시기와 비슷해서 당시에 대한 일종의 그리움 같은 것이 있다. 따라서 그 시기를 다룬 이 소설에서 당대의 풍속과 문화 특히 다양한 생활 풍경과 대중문화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

사실 이 소설을 읽고자 한 계기는 상당 부분 그런 기대에 있었다. 부분적으로 어색하다고 느낀 대목이 있다. 대표적으로 명훈의 죽음 같은 것은 너무 느닷없고, 영희가 어머니를 찾아가 화해(?)하는 대목도 부자연스러웠다. 너무 서둘러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인철의 첫사랑인 명혜와의 사연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명혜의 발레 공연 관람 대목에 상당히 긴 분량을 할애해 묘사한 것을 보더라도 인철의 명혜에 대한 감정의 깊이와 그 순수함을 느끼게 한다. 소설의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빛이 인철의 사랑의 이데아로서의 명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아니겠는가.

한국사의 최대 격동 시기를 이만큼 집약해서 형상화한 것만으로도 『변경』이 거둔 성과는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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