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는 언제 오는가?
사위가 새 차를 샀다. 오늘이 우리 가족 모두 시승을 하는 날이다. 사위는 캠핑 가는 걸 좋아한다. 차에는 늘 캠핑 도구가 가득하다. 트렁크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타야 할 뒷좌석에도 물건이 주인이다. 아마 사위는 차 바꿀 생각을 오래전부터 한 듯하다. 캠핑 다니는 데 적합한 차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생필품 하나를 사는 데도 꼼꼼하게 비교해 보는 성격이니 차 바꾸는 계획을 ‘수립’ 하고 ‘실행’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새로 산 차는 SUV 차량이다. 차체가 크고 높다. 전에 타고 다니던 차와는 비교할 수 없이 ‘럭셔리’한 차다. 도로에 지나다니는 이 차종을 자주 보아 와서 낯설지는 않은데 차 이름을 무어라고 읽는지 헷갈리던 차다. Palisade라는 차인데 그걸 ‘팔리사데’라고 읽는지 ‘펠리세드’라고 읽는지 궁금했었다. 이번에 알았다. ‘펠리세이드’라고 읽는다는 걸.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울타리’ ‘말뚝’이라는 뜻으로 나오는데 자동차에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에쿠우스’가 말이라는 라틴어를 의미하듯 이 이름도 무슨 사연이 있을 텐데···. 가족 시승일을 이날로 잡은 것은 마침 새 차를 인수하는 날이 가족이 함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연극이다. 정작 연극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출신의 프랑스 작가 사무엘(우리말 표기로는 사뮈엘이라고도 하는 것 같은데 어느 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베케트의 대표작이다.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을 놓고 여러 사람이 여러 말을 해온 화제의 연극이다. 누구는 고도를 신이라 하고, 누구는 희망이다, 누구는 구원이다 등등 제각각 그럴듯한 해석을 해왔는데 ‘고도’가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물었을 때 작가 베케트는 ‘나도 모른다’고 했다고 한다. 내가 이 연극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70년대 후반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보았다. 오태석이 연출했었던 것 같다. 지금 그 작품에 대한 기억은 없다. 배우가 누구였는지도, 작품의 내용도. 정작 내용은 나중에 책을 보고 알았다. 지금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당시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일 테고, 또 어렵고 지루한 연극으로 느껴서였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창고극장에서 본 같은 연출자의 <춘풍의 처>나 (아마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보았을) <LUV> 같은 작품은 비교적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이번에 공연을 보고 이 연극은 젊을 때보다는 나이 들어 보는 게 더 가슴에 와닿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찍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우리 연극계에 레퍼토리 작품으로 정착시킨 분은 임영웅 선생이다. 신촌의 산울림 극장에서 오랫동안 간판 연극으로 공연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늘 벼르면서도 선생이 연출한 작품을 보지 못했다. 그 아쉬움을 이번에 충분히 해소한 것 같다.
아마 근래 들어 이렇게 화제가 된 연극도 흔치 않을 것이다. 작품의 명성도 그렇지만 출연 배우의 무게감 때문이다. 다섯 명의 배우가(그것도 상당 분량을 신구와 박근형 두 배우가 이끌어 가는), ‘간소하고 절제된’ 무대장치를 배경으로, 많은 분량의 대사를 위주로 진행하는 연극이라 자칫 지루하고 늘어지기 십상인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과 몰입의 상태로 관람했다. 숨 돌릴 사이 없이 빠르게 이어지는, 그리고 작고 속삭이는 듯한 대사들도 비수처럼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은 배우들의 뛰어난 발성력 덕분이다. 한마디로 장인들의 내공이 여지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당초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전원이 남자들인데(그래서 남자 죄수들의 교도소에서 많이 공연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럭키 역은 박정자 씨가 맡아서 화제가 되었다. 본인이 자청해서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보았다. 연극은 1막과 2막 사이의 20분간의 휴식 시간을 포함해서 공연 시간이 2시간 반에 이르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공놀이하듯 주고받는 고고 역의 신구와 디디 역의 박근형의 대화를 비롯해서 럭키 역의 박정자의 신들린 듯한 긴 대사, 포조 역 김학철의 ‘칼칼하고 장작을 쪼개는 듯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극은 톡톡 튀는 코믹함과 팽팽한 긴장감이 교차하면서 시종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박정자 씨가 출연하는 연극을 자유극장 시절부터 봐왔지만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새로워지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배우들의 걸출한 연기는 ‘명불허전’이란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신구 선생이 연기한 블라디미르(디디)의 구두가 기억에 남는다. 연극은 디디가 구두 벗는 장면부터 시작하는데 1막이 끝나면서 배우들이 퇴장하고 막이 내린 무대에 ‘외롭게’ 남은 구두는 고흐의 그림 <구두>를 떠올린다. 농부의 고단한 삶이 오롯이 배어 있는 그 구두 그림을 두고 하이데거가 글을 쓰기도 했다. 한 사람의 고단한 인생을 그 낡은 구두만큼 절실히 표현할 수가 있을까. 디디의 고단한 삶이 그 구두에 담겨 있는 것이다. 연극이 끝났을 때 나는 가슴이 찡해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 삶이라는 게 그렇게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시간의 연속이 아닐까? 내일은 나아지겠지,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이 올 거야. 우리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결국 그런 날이 언제 올지, 오기는 오는지, 아니, 우리 삶이라는 게 그저 ‘기다려야 하는’ ‘기다릴 수밖에 없는’, 고통의 연속이 아닐까?, 또, 무거운 짐을 들고 줄에 묶여, 채찍질을 받으며 누군가의 호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럭키(이 이름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국립극장을 나와 장충동 원조 냉면 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연극을 보면서 잠깐 깜빡 졸았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말도 있었다. 연극을 본 감상은 제각각이었지만 배우들에 대한 경외감은 공통된 듯했다. 문득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고도는 이미 왔을지도 모른다고. 고도가 이미 내 곁에 와 있는데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