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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Dec 30. 2023

다시 쓰는 일기 28 – 2023.12.XX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 하면 오 헨리의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제목도 「크리스마스 선물」로 알려진 소설인데 원제는 「The Gift of the Magi」라고 한다. 내용이야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어느 해 크리스마스 무렵, 수중에 1달러 87센트밖에 없는 가난한 부부가 서로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면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것이다. 아내는 금발을 잘라 남편의 금 시곗줄을 사고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를 위해 고급 머리빗을 산다는 이야기다. 지금 새삼 그 소설을 떠올려 보면 좀 억지스러운 데가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애틋한 감동이 그 뒤에도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었다. 나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선물을 주고받은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 학교 다닐 때는 친구끼리, 직장 생활하면서는 직원들끼리, 또 가족 간에(특히 생일이나 입학과 졸업 같은 기념일에). 그런데 내가 받은 선물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몇 개 있으나 내가 선물한 것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것은 아마 내가 받기만 하고 주는 데는 인색했던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설사 주었다 해도 형식에 치우치고 정성은 부족했던 데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받은 선물 중에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것들이 몇 개 있다. 만년필이나 넥타이, 목도리, 장갑 같은 물건들도 있지만 특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직원들이 마련해 준 사진첩이다. 부서 이동을 하거나 해외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그리고 퇴직 시에 받은 것인데 근무 중이나 행사 때에 직원들과 같이 찍은 사진들을 모은 것이다. 사진마다 일자와 장소, 사연 등이 적혀 있고, 특히 직원들 각자가 내게 남기는 짤막한 문장들이 적혀 있어 세월이 지나 다시 들쳐볼 때마다 훈훈하고 아름다운 추억에 젖게 된다. 내용물도 그렇지만 사진첩 한 장 한 장이 예쁘고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어 그 정성에 더욱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20년쯤 전, 오래 근무하던 부서를 떠나 다른 부서로 이동할 때 받은 사진첩이 있었다. 한 여직원이 쓴 글에 ‘부장님, 사랑해요’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이를 본 막내아들(당시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이었다)이 제 엄마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엄마, 이 누나나 아빠를 사랑한대. 어떡해 엄마’ 하며 걱정하더라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 한참을 웃었다(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도 썼던 것 같은데 얼마나 기억에 남았으면 또 반복하는 건지!). 받은 선물에 대한 기억은 있어도 준 선물에 대한 기억은 없다는 말을 했는데 언젠가 한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잊히지 않는다. 소문난 애처가인 그 선배는 결혼 30주년인가 40주년인가 되는 해에 아내에게 기념패를 만들어주었다고 했다. 패에는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의 글’을 적었다. 지금 그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글에 담긴 지극한 아내 사랑에 감동했던 여운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내에게 그보다 더 소중한 선물이 있었겠는가! 나는 그때 내가 얼마나 무심한 남편인가 하는 반성을 했었다(그럼에도 그 후에도 별로 변한 게 없으니···)     



뜬금없이 선물 이야기를 하는 것은 며칠 전 크리스마스 때 받은 선물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사용하던 컴퓨터는 예전에 둘째 딸이 사용하던 것이다. 10년도 넘은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에 익숙하지도 않고 또 컴퓨터를 쓸 일도 많지 않은 나로서는 사용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이렇게 글을 쓸 때나 사용하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하겠다. 2, 3일에 한 번쯤 읽은 책의 밑줄 친 대목을 옮겨 적거나, 한 달에 서너 번 브런치 등에 글을 쓰는 정도다. 그러니 오래되고 기능이 제한적인 컴퓨터라고 해도 작업하는 데는 아무 불편이 없었다. 그러다가 몇 달 전부터 주식 투자에 ‘몰두’하면서 컴퓨터를 쓰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의 오전 내내 DTS 프로그램을 열어놓고 모니터를 바라본다. 그런데 한 달쯤 전부터 컴퓨터가 계속해서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C drive의 저장 공간이 부족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조치 사항을 지시(무슨 '조각모음 운운'하는)하는데 그 지시대로 하면 잠시 후 00MB저장 공간이 확보되었다는 문자가 나와서 안도하고 작업을 계속하면 금세 다시 동일한 경고가 나타났다. 다시 하라는 대로 해보지만 잠시 후 또 같은 경고가 뜬다. 문서 작성이나 인터넷 접속 정도나 할 줄 아는, ‘컴맹’이나 다름없는 나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런 상황이 반복되던 참에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집에 온 막내아들에게 사정을 말하자 여기저기 인터넷 정보를 검색하더니 이런저런 조치를 시도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아들이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지만 무슨 말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컴퓨터가 너무 오래되어 그렇다는 말만 귀에 들어올 뿐이었다. 아들이 ‘연구’ 끝에 키보드를 몇 개 두드리자 역시 조각모음을 모은다는 메시지가 뜨면서 컴퓨터가 제 스스로 작업을 진행해 나갔는데 내가 경험한 방식과는 다른 것 같았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고 5시간 6시간이 지나도 공간 확보 작업은 이어졌다. 1차가 지나면 2차, 2차가 지나면 3차, 결국 10차까지 가서야 끝이 났는데 10시간도 더 걸린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런 작업의 결과로 9GB의 공간이 확보되었다고 했다. 9GB가 얼마나 되는 용량인지 감이 잡히지는 않지만 당분간은 걱정 없이 쓸 수 있다기에 안심이 되었다. 이제 주식도 못하고 글도 못 쓰게 되나 하고 조바심을 내던 차에 그런 결과를 얻게 되어 아들이 얼마나 대견한지 몇 번이나 등을 두드리며 칭찬해 주었다. 다음 날 오후였다.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현관에서 벨 소리가 나고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나가더니 납작한 상자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택배였다. 전에도 가끔 아이들이 레고 블록 같은 걸 주문해 왔기에 또 그런 건가 했는데 노트북이었다. 컴퓨터 때문에 속앓이를 한 내가 안쓰러웠던지 저희들끼리 상의해서 노트북을 선물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제 9GB나 확보해 놓았으니 당분간은 걱정이 없겠다며 안심하고 있던 나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아이들이 부품을 꺼내서 설명을 해주고 증권사 DTS를 깔고 작동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옆에서 아내는 ‘자식 잘 뒀네.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해요’ 하며 나를 부추기고, 아이들은 ‘이제 아빠 주식해서 돈 많이 벌겠다. 저렇게 좋은 컴퓨터 사줬으니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놀렸다. 나는 한편 기쁘고 한편 겸연쩍기도 해서 ‘아니, 이제 지금 컴퓨터로도 충분하게 됐는데 뭐 하러 돈 들여서 새 걸 샀느냐’는 말만 반복했다. 노트북을 내 방에 가져와서 연결하고, 키보드도 두드려 보고, USB를 꼽아서 그동안 내가 써 놓은 글도 확인해 보았다. 내가 받아본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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