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면서생
‘여기 좀 와 보라’는 아내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가 보니 주방 천장에 부착되어 있던 조명기구가 선 하나에 매달려 곡예하듯 늘어뜨려져 있다. 주방 수납장을 열다가 수납장 문에 부딪혀 떨어졌다고 했다. 그나마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는 게 다행이었다. 조명기구를 천장에 고정시킨 못이 빠지면서 내려앉은 것이다. 몇 년 전 이 조명기구로 갈아 달 때도 천장이 약한 곳은 못이 헐거워서 애를 먹었다. 할 수 없이 단단한 곳에만 고정되고 약한 부분은 어설프게 걸린 기우뚱한 상태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보기에 좋지 않았지만 ‘다른 수가 없어’ 그 상태로 지금껏 써오던 것인데 이번에 사달이 난 것이다. 내려앉은 전등을 다시 부착하기 위해서는 전원을 차단하고 전선을 뽑았다가 조명기구를 다시 천장에 고정시켜서 선을 연결한 후 덮개를 덮어야 했는데 아내는 그냥 이 상태로 놔두었다가 주말에 막내아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다행히 전등은 켜져 있는 상태이고 밤에 작업하기는 어려운 일인 데다, (이게 가장 중요한데) 어차피 내 ‘재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아내 말대로 전등은 허공에 매달린 채 며칠을 보낸 뒤 주말에 (이과 출신인) 아들이 오고 나서야 겨우 수습이 되었다. 나는 그저 아들의 작업 모습을 지켜보며 아들이 요구하는 연장을 가져다주고 작업이 끝난 후 의자를 치우는 등의 뒤치다꺼리만 했을 뿐이다. 요즘 한창 재건축 말이 나도는 우리 아파트는 지은 지 30년이 넘었고 내가 이사와 산 지도 20년이 넘었다. 집 구석구석이 낡아서 손을 보려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외벽 창틀 사이에 틈이 벌어져 비가 오면 벽에 결로 현상이 생기고, 보일러 관이 낡아 언제 무슨 ‘사단’이 날지 불안한 상태다. 베란다로 물이 떨어진다고 아래층 주민의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방마다 조명기구가 온전한 것이 거의 없고 방문의 잠금장치는 망가져서 여닫기가 불편한 데다 화장실 변기에 문제가 생기는 등 크고 작은 고장들이 발생한다. 웬만한 불편은 그냥 견디고 살거나 어설프게 임시조치를 하고 지낸다. 손재주가 조금만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가 해결할 만한 일도 그냥 방치하고 있다가 도저히 그냥 두고 지낼 수가 없는 상황이 되면 ‘사람을 부를 수’밖에 없다. 제 집의 사소한 고장이야 스스로가 감당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참 딱한 일이다. 마당에 널어놓고 말리던 곡식이 비가 와서 다 젖는 데도 사랑방에 앉아 글이나 읽었다던 옛날 ‘선비’ 생각이 난다.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고 ‘사서삼경’이나 읽고 있으면 밥이 나오는가 떡이 나오는가. 내가 그 짝이 아닌지.
영화배우 남궁원 씨가 별세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사이 한때 (특히 1960년대) ‘세상을 풍미’했던 이름난 배우들이 세상을 떠났는데 이번 남궁원 씨의 소식은 내게 남다른 감회를 갖게 했다. 이미 두 번이나 다른 글에서 이야기했기에 식상할 만한 일인데,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본 한국 영화(아주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영화관에 간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으니 기억에 남은 영화로는 이 영화가 처음이다)는 남궁원 씨가 주연한 영화 <국제간첩>이다. 지금 광화문 사거리 동화면세점 자리에 있던 국제극장에서 보았다. 그런 인연 때문일까 나는 유별나게 남궁원 씨를 좋아했다. 남궁원 씨가 나오는 영화를 한 30여 편은 보았을 것이다. 지금 기억하는 제목들만 해도 <국제간첩>을 비롯해서 <8240 켈로>, <최후전선 180리>, <영등포의 밤>, <하얀 까마귀>, <남과 북>, <화녀>, <암살자>(이어령 원작 소설), <내시>, <나그네 검객>, <다정다한>, <만선> 같은 영화들이다. ‘한국의 그레고리 펙’이라 불린 남궁원 씨는 다양한 분야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많이 본 건 (그때 내 나이 또래로는 당연하게) 전쟁영화, 첩보영화, 그리고 사극(특히 검객 영화)이었다. 1960년대는 007 영화 붐을 타고 첩보영화가 유행했는데 남궁원 씨는 그런 ‘액션’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나는 남궁원 씨가 나오는 영화뿐만 아니라 그가 소개된 영화잡지도 열심히 구해서 읽었다. 그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영화 데뷔는 언제 했는지. 키는 몇 센티미터이고 가족관계가 어떤지까지도 꿰고 있었다. 그만큼 열성적인 ‘소년 팬’이었다. 당시 만리동에 살던 중학교 동급생 친구가 있었는데 집 근처에 영화 촬영소가 있었다. 나는 가끔 그 촬영소에 구경 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많은 영화배우를 볼 수 있었다. 어느 날인가 그곳에서 남궁원 씨를 본 적이 있다. 전쟁영화였는지 베레모에 전투복 차림이었는데 그 후리후리하게 큰 키에 눈이 부실 만큼 수려한 용모는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선이 굵은 서구적인 용모이면서도 부드럽고 따스하고 인자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웃을 때가 그랬다. 몇 년 전인가 어느 방송에서 신영균 씨가 남궁원 씨가 투병 중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 그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의 타계 소식을 들으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내 소년 시절의 소중한 추억 속에 자리한 남궁원 씨,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