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효당 Feb 20. 2024

못 보고 지나친 표지들

노년단상 16

두 달 동안의 방학이 끝나고 지난주에 서예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수강 신청은 앱으로 해야 하기에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시니어들은 신청일을 앞두고 늘 긴장된다. 인기 있는 강좌는 조기에 마감되는 사례가 일반적이어서 신청일 아침 9시를 기다렸다가 잽싸게 신청해야 하는데 어물어물하다가는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대기 순번을 받아 놓고 결원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자녀들이 대신 신청해 주는 사례가 흔하다. 나도 둘째 딸에게 부탁해서 지금까지는 실패 없이 몇 년째 공백 없이 배우는 중이다. 새 학기면 늘 새 얼굴이 서, 너 분 보이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이전부터 꾸준히 수강하는 분들이다. 수강 이력이 10년이 넘는 분도 두셋 있고 나처럼 5년 내외가 되는 사람이 서너 명, 그리고 이제 한두 해 정도 되는 분들에 나머지는 한 학기를 주기로 들고 나는 분들이다. 이번 학기에도 새 얼굴이 두 분 있었다. 새로 들어온 분에게 이런 모임은 첫날이 참 어색하다. 한쪽에서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는데 장소도 사람도 낯선 데다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고, 또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처음 이 모임에 들어왔을 때 나도 그랬다. 다행히 어느 분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고 안내를 해주어서 고마웠던 기억이 있다. 

  늘 옆자리에 나란히 앉게 되어 짝이 된 김 선생과 안부 인사를 나누고 붓과 화선지를 꺼내 펼쳐 놓고 글씨 쓸 준비를 하는데 김 선생이, ‘그 왜, 아무개 여사 있지 않느냐’며 그분이 지난해 말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지지난 학기까지 다니다가 나오지 않던 분인데 얼른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김 선생은 사는 동네가 그분과 같기도 했지만 친화력이 있는 분이라 회원들 누구 하고도 친했다. 자리가 어디였고 또 모습이나 옷차림이 어땠으며 지지난 학기 종강 후 식사할 때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기억이 났다. 단아하고 기품 있는 분이었다. 김 선생 말로는 나이는 60대 후반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자세한 병명은 모르겠으나 ‘무슨 암’으로 몇 달 고생하시다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어찌 그리 잘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 따님이 문자를 보내왔다고 했다. 김 선생과 그분은 서로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는데 그분이 돌아가신 후 따님이 어머니 휴대전화에 저장된 지인들의 전화번호로 사망 소식을 알려온 모양이다. 그러니까 ‘사망자(이름)가 보낸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재작년 회사 선배가 사망했을 때도 그랬다. 십 년 넘게 연락이 없던 ㅇㅇㅇ 이름의 문자가 왔기에 반갑게 열어보니 아버지의 부고를 전하는 아들의 메시지였다. 그때 기분이 참 묘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이름으로 전해지는 소식! (비록 자녀가 적은 것이지만) 결국 스스로의 사망 사실을 공지하는 셈이 되지 않았는가. 새삼 그 화사하고 단아하던 ‘아무개 여사’의 모습이 떠오르며 숙연해졌다. 아직 더 사실 나이인데···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삶의 모든 것이 다 표지야.”

“천지만물은 그것이 창조되던 태초에는 온 세상이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잊혀져버린 어떤 언어에 의해 만들어졌지. 난 사물들 속에서 바로 이 우주의 언어를 찾는 중이야···” 

···”그럼 난 어떻게 미래를 짐작할 수 있을까? 그건 현재의 표지들 덕분이지. 비밀은 바로 현재에 있네.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면, 현재를 더욱 나아지게 할 수 있지. 현재가 좋아지면, 그다음에 다가오는 날들도 마찬가지로 좋아지는 것이고···하루하루의 순간 속에 영겁의 세월이 깃들어 있다네.”

···“그래 내가 만난 것들을 일일이 떠올리자면 끝이 없겠지. 내가 지나온 길에는 곳곳에 표지들이 숨겨져 있었어. 덕분에 난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거야’...

...”삶의 중요한 길목에서 내가 잘못된 길로 접어들려 할 때, 어떤 사물이 혹은 누군가가 ‘우주의 언어’로 내게 그것을 일깨워 주려 했지만, 나의 눈과 귀가 어두워서 그것을 식별하지 못한 것일 테니....“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말들이다. 


책을 읽은 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표지들을 보고서도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조언의 형태로, 또는 어떤 사건의 모습으로, 때론 꿈의 형태로 내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이 길이 아닌 저 길로 가라든가, 멈추라든가, 잡으라든가, 침묵하라든가, 말하라든가, 참으라든가···. 수많은 갈래길에 숨겨진 표지들 가운데 다행히 내 눈에 잡히고 그 표지에 따라 행로를 잡았던 일은 얼마나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수많은 표지들 중 내가 의미를 알아챈 것은 불과 몇 개밖에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우주는 그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는데,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이 간절하지 못했거나 내 눈과 귀가 어두워서 그것들을 식별하지 못한 표지들···. 이제 남은 날이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현재 이 순간에도 내 앞 어딘가에 표지는 숨겨져 있겠지. ‘비밀은 바로 현재에 있다’는데, ‘현재의 표지들 속에 있다’는데, ‘하루하루의 순간 속에 영겁의 세월이 깃들어 있다’는데, ‘현재가 좋아지면 미래도 나아진다’는데···. 서예 교실 새 학기를 맞으며, 어느 분의 별세 소식을 들으며, 되뇌어 보는 말들이다.


<표지는 금호미슬관 전시회에서 본 송은영 작가의 작품임>          

작가의 이전글 다시 쓰는 일기 30 – 2024.2.X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