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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Feb 29. 2024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필요 없다’

노년단상 17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필요 없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런 내용의 글을 썼다고 한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읽었고, 유튜브에서도 들었다. 처음 그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읽었을 때 ‘다산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 의아한 느낌이었다. 나이가 들면 오히려 친구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다산이 어느 글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출처가 나와 있지 않아 긴가민가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18년간의 고독한 유배 생활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었을까? 그런데 그 글을 몇 번 읽고 나니 맞는 말이구나 하고 공감이 가는 대목이 많았다. 다산은 ‘나이가 들면 지인들이 점점 줄어든다. 이것은 친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필요 없어져서’라고 했다. 그런 한편으로 가족과 가정이 소중해진다고 했다. 친구가 없어진다고 해서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자연의 순리니 그대로 받아들이라고도 했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 친하던 친구도 나이 들어서 만나면 불편하고 어색하며 지루해지기 때문에 하나둘 멀리하게 되고 차츰 가족과 함께하거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데 그런 시간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친구와 멀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 지적한 ‘가치관의 차이’는 참 적절한 것 같다.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면 의견의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부딪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감정이 상해서 만남 자체가 불편해지는 사례는 자주 겪는 일이다. 사귐의 시간이 오래되고 오래되지 않은 것을 떠나 가치관이 비슷하면 깊은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친구와 만나면 편하고 즐거우며, 말이 통하고 가슴속 이야기도 부담 없이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진정한 친구 한둘은 있어도 좋다고 했다(그런데 그런 친구를 둘이나 가질 수 있을는지?···). 그러니까 다산이 강조하는 말은 이렇게 요약될 것 같다. 나이 들어 친구가 줄어드는(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그렇고 그런 어중이떠중이 친구와는 멀어지는 것이 좋다. 그 대신 가족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또 혼자 있음에 익숙해져라, 다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만나면 즐거운, 가치관이 같은 진정한 친구 한둘은 있는 게 좋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친구들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헤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나서다. 그런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공통적인 것이기에 한때 ‘아이러브스쿨’인가 하는 사이트를 통한 친구 찾기 붐이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몇 명인가 소년 시절 친구를 만났지만 두세 번 만남이 고작이었다. 처음 한두 번의 반가움이 지나자 다산의 말처럼 만나면 ‘불편하고 어색하고 지루’했다. 그 이후로는 예전처럼 소원한 관계로 돌아갔다. 고등학교 때 아주 가깝게 지내던 친구 다섯이 있었다. 오총사로 불렸다. 서로의 부모도 잘 알고 집도 자주 내왕하며 형제처럼 지냈다. 졸업 후 두세 해는 그런 관계가 지속되더니 언젠가부터 연락이 뜸해졌다. 가는 길이 다양했고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바쁠 때였다. 누구는 이민을 갔다고 했고 누구는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세월이 한참 지나 동창회에서 그중 한 명을 만났지만 반가움은 잠시였고 역시 그 뒤로 소원해졌다. 나머지 네 명에 대해서는 행방도 모른다. 가끔 그 친구들을 떠올리며 쓸쓸해질 때가 있다.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어디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어색한 몸짓으로 몇 마디 안부를 묻고는 그만일 것 같다.      

 정기적으로 통지를 해오는 모임이 있다. 고등학교 동창회, 동기회거나 대학 서클 동문이거나 직장을 매개로 한 모임이다. 최근 들어 그동안 간간이 나가던 모임들 중 대학 서클 모임과 직장 동기 모임, 그리고 학교나 직장을 매개로 한 것이지만 특별한 사연으로 얽힌 몇 사람 간의 친목을 빼고는 하나둘 멀어져 갔고 또 멀리하게 되었다. 지금 새삼 인맥을 쌓아야 할 처지도 아니니 학교 동창회를 기웃거릴 입장이 아니어서, 아직도 재직 시절의 서열에 얽매여서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화제와 매너를 반복하는 그 형식이 싫어서다. 외톨이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 외면하면 ‘금 밖으로 밀려나는’ 것 같은 불안감에 마지못해 발을 걸어놓고 있는 모임 몇 개도 즐거움보다는 불편할 때가 많다. 다산의 말처럼 가치관의 차이를 느낄 때가 많아서다. 누구의 가치관이 옳고 그르고가 아니라 다른 것을 인정치 않으려는 그 행태가 싫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대체로 늘 겉돌거나 아니면 그냥 듣기만 한다(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개진하면 다툴 수밖에 없다). 다산 선생의 글을 읽고 나니 이제 그런 만남은 과감하게 정리해도 좋을 것 같다.      



다행히 내겐 정말 마음이 통하는 지인 하나가 있다. 나보다는 몇 해 연상이고 회사의 선배였기에 친구라고 하기는 실례되는 말일지 모른다. 햇수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서른몇 해가 넘었으니 짧은 기간은 아니다. 회사 재직 시에도 가깝게 지냈지만 퇴직 후 더욱 돈독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계기가 된 사연이 있기는 했다. 그분과는 두 달에 한 번 만나서 점심 심사를 같이 한 후 찻집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화제는 다양하다. 무엇보다 서로의 가치관이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삶에서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과 의견이 일치한다. 서로의 입장과 처지, 생각에 대체로 공감한다. 설혹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차이를 존중한다. 더 중요한 건 차마 아내에게도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감추고 숨기지도 않는다. 진솔하고 가식 없고 솔직한 대화가 오간다. 고통과 고민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는 가운데 이해받고 위로받고 치유도 된다. 그런 소중한 만남이 어디 있겠는가? 다산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 그분과의 각별한 인연에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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