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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Mar 08. 2024

'세상에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이름의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기상천외의 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요 며칠 나는 이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올린다. 지난달 29일 올린 브런치 글 때문이다. 2년 남짓 브런치에 글을 써 왔는데 독자는 8명이었고, 하루 평균 조회수는 10 내외에 아주 많을 때(브런치에 글 올린 날)라야 20 남짓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것이 브런치에 올린 첫날 순식간에 조회수가 치솟아서 5,000이 넘었고, 다음날은 12,000이 넘었다. 몇 달 전에 올린 어떤 글 하나가 느닷없이 1,000을 넘어가길래 이게 무슨 조화인가 하고 ‘놀랍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지만 바로 다음 날 평소 숫자로 ‘제자리’를 잡아가기에 ‘안도’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기간이 늘어나서 나흘째가 되어서야 100 단위로 떨어졌는데, 다시 다음날부터 2,000에서 8,000으로, 또 10,000으로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기적’이 이어지니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뿐인가, ‘비 온 뒤에 대나무 순 자라듯’ 구독자가 늘어나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중계방송하듯 아이들에게 이런 기이한 현상을 알려주기 바빴다. 도대체 그 글이 왜 그토록 관심을 끌고 있는지, 그 배경에 어떤 ‘메커니즘’이 있는지 ‘불사사의’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흥부가 박을 켜자 보물이 쏟아져 나왔을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흥부는 부러진 제비 다리를 치료해 주어서 받은 인과응보의 결과였지만 나는 ‘거저 얻은 복’이라 더욱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4, 5년 전부터 블로그에 이런저런 글을 써왔다. 고궁, 사찰 등 문화유적 답사기나 책 읽은 소감,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간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메인으로 올리고 그 밖에 간간이 개인적인 옛날 추억담 같은 글들을 곁들이는 형식이었다. 하루 방문객이라야 10명 미만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열성적이어서 일주일에 하나 꼴로 포스팅을 하느라 제법 부지런을 떨었고 그게 늘그막에 소일거리로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그러다가 브런치를 알고부터는 ‘글 같은 글’을 써보겠다는 각오로 블로그에서는 할 수 없었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일기나 에세이 형식을 흉내 내어 써오면서 이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상상력이 풍부하거나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오로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들을 소환해서 늘어놓는 글이 많아지게 되었다. 산 날이 오래고 또 비교적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우려먹을’ 수 있는 과거라는 게 뻔하여 차츰 소재의 고갈을 절감하며 때로는 이런 이야기까지 써도 되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한 줌의 누룽지마저 얻고자 가마솥 바닥을 구멍이 날 만큼 박박 긁어대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딘가에 뭔가를 끄적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내는 무슨 글을 쓰는지 자기도 좀 보자고 하지만 알려준 적이 없다. 가까운 지인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다. 다만 두 딸에게는 알려주었는데 모니터 역할이 필요해서였다. 딸들에게는 알려주면서 자신에게는 비밀로 하는 내가 아내는 참 서운한 모양이다. 가끔 망설이는 때가 있지만 아무래도 모르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마치 길거리에 벌거벗고 나서는 듯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내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중에 어떤 계기로 각오가 바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죽는 날까지 이 원칙을 지켜갈 것 같다. 언젠가 신문에서 가천대 이길여 총장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서두에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회장의 이런 말이 인용되어 있다. “2022년 말 총장님을 오랜만에 만났어요. 보통 그 연세이면 ‘추억을 곱씹거나’ 건강 이야기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총장님 입에서는 AI, 쳇 GPT가 가장 많이 나왔어요”(추억을 곱씹거나의 따옴표는 내가 한 것임). 이 총장은 올해 연세가 아흔둘이라는데 그분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나는 줄곧 지나간 추억만 되새김질하고 있으니 한층 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비교하는 게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한편 생각하면 사람은 저마다의 개성과 처지와 성향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추억팔이를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구질구질하지 않게, 청승맞지 않게, 나름대로 아름답게 반추하고 재구성해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노년의 삶의 긍정적이고도 건전한 활력소로 작용하게 하는 고민은 필요할 것 같다.      



보잘것없는 짧은 글이 과분한 반응을 받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글이 있다. 박완서의 산문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다. 마라톤 대회로 도로가 통제되어 버스 안에서 갇혀 있던 작가가 마라톤의 선두 주자가 보고 싶어 버스 안내양과 실랑이를 벌인 후 차에서 내려 달려갔는데 이미 선두 그룹은 지나가고 환호하던 군중들도 흩어지고 없었다. 근처의 라디오방에서는 선두 주자가 결승점을 골인하는 중계방송이 들렸는데 군중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들렸다. 작가가 서 있는 도로 삼거리에서 골인 지점까지는 상당한 거리였는데도 도로 통제가 풀리지 않은 건 아직 남은 후속 주자들 때문이다. 꼴찌에 가까운 주자들이다. 작가는 맥이 빠졌다. 그는 영광의 승리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 비참한 꼴찌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도로는 여전히 통제 중이다. 그 꼴찌 주자들 때문이다. 차들도 부르릉거리며 짜증을 낸다. 길거리를 지켜보던 남은 사람들도 라디오방으로 몰려가 우승자의 골인 광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다. 그때 저만치서 푸른 유니폼을 입은 마라토너가 나타난다. 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가는 그를 보면서 ‘조금쯤 우습고, 조금쯤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선수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작가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작가는 여태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등 수를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지금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고 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위대해 보였다. 작가는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지른다. ’나는 그가 주저앉는 걸 보면 안 되었다. 나는 그가 주저앉는 걸 봄으로써 내가 주저앉고 말 듯한 어떤 미신적인 연대감마저 느끼며 실로 열렬하고도 우렁찬 환영을 했다‘고 작가는 적었다.      

아마 이번 내 글에 보내준 격려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내 논에 물 끌어대는‘식의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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