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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Jan 06. 2024

선배?

보통 낯익음에 즐거운 대화인데...

학교 선배를 만나는 건 보통 자신이 그 선배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기쁜 대화이지 않은가. 낯익음과 낯섦의 조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할 말도, 궁금증도 대방출하게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선배랑 대화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아예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나의 고등학교 선배라고 인사한다면 어떨까? 


2023년 12월 19일, 겨울방학을 집에서 보내기 위해 탑승한 KE 086 00:10분 비행기 8열에서 그 언니를 만났다. 난 얼굴도, 이름도 귀신같이 잘 기억하는 (심지어 외국애들 성까지 철자법 자체를 한번 보면 다 외워버린다) 사람이라 그 언니가 "어머 너 디어필드 다녀?" 라고 물어왔을 때 내 머리는 당황했다. 어? 선배인가? 후배인가? 정말 한번도 본 적 없는데. 처음에는 소통을 잘못해서 난 그 언니가 현재 디어필드 class of '26 라는 줄 알고 나보다 한두살 어리겠구나 생각이 들어 동생 대하듯 말 하다가, 언니가 나중에 정정해서 class of '22라는 걸 안 후에 바로 말투를 바꿨다. 같은 한국인이고, 유펜을 다니고 있고, 내가 아는 우리 고등학교 동문 유펜 선배 언니들도 공통으로 알고 있단다. 이 사람은 그럼 대체 누구지? 


디어필드는 학교 아이덴티티가 워낙에 강해서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서로를 가족같이 대하고, 정원도 650명뿐이라 웬만한 애들 얼굴은 다 한번씩 볼 수 있을만큼 작은 사회여서, 내 바로 윗학년 사람 중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일은 드물다. 이름 잘 외우는 내 성향도 고려하면, 한번도 그 언니의 언급을 듣지 못했다는 게 가히 쇼킹했다. 그런데 또 이 언니는 코로나 때문에 11학년을 집에서 보내고 12학년은 학교를 들락날락하듯이 했단다. 아무리 그래도. 멘션 한번 들어본 적도, 인스타 태그 한번 본 적도 없다고? 내가 지금 귀신이랑 얘기하는 걸까? 소름이 좀 끼쳤다. 언니가 너무 상냥하고 인상이 착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트루먼쇼" 호러 리메이크에 출연하는 것처럼, 모두가 동참하고 있는 끔찍한 장난의 놀림거리가 되는 기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언니 이름도 까먹어 버렸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인스타라도 알아내서 나중에 이 언니 뭐하는 사람인지 검색해 봐야지 하고 인스타를 물어봤는데 인스타를 지웠단다. “I'm on a cleanse." 소셜미디어에 너무 치여살아서 그만뒀다나? 나도 최근에 번아웃과 함께 그런 지침을 느끼던 차라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약 2주가 지난 채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보는데,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 디어필드라 쓰여 있는 건 없었다. 디어필드 옷을 입고 공항에 가지 않았고, 가방에도 별다른 마크나 태그가 달려있지 않았고, 디어필드 스토어에서 산 폰껍질을 버린 채도 오래다. 


그럼 나의 무엇을 보고 디어필드 학생이라 알아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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