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셋
내가 등반가의 꿈을 접고 로프맨이 된 건 살기 위해서였다. 산악동호회를 상대로 암벽등반 강습에 등산학교 강사 자리까지 제의를 받았지만, 산은 더 이상 내게 설렘이나 즐거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정상을 바라보면 영석이 형과 셰르파 두르바의 얼굴이 떠올라 매번 식은땀이 나고 현기증이 일었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죄스러움일 것이다. 인생은 어떻게든 살아지는 법인지 다행히도 빌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면 온갖 시름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숨이 트이고 바람도 느껴졌다. 그쯤이면 살만한 거라 여기며 하루를 보내고 몇 달을 보내고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지난겨울 저물녘······. 아버지가 절룩거리며 내게로 왔다. “오늘이 내 생일이다. 칠십이나 살았는데 잔치는 못 해도 밥 한 끼는 같이 먹어야지.” 아버지의 생일도 겨울이었다는 걸 난 그때 처음 알았다. 제법 유명하다는 을지로 냉면집에서 불고기와 냉면을 먹었다. 매번 그랬듯 밥만 먹고 또 훌쩍 떠날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그간 고생 많았다는 말로 모든 걸 퉁 치고는 그냥 눌러앉았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무르익었건만 아버지는 떠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이어진 일상의 어색. 침묵으로 점철된 저녁 식사. 텔레비전을 보다 코를 고는 아버지는 더 이상 ‘이건 정말 비밀인데’라며 은밀하게 속삭이던 중년의 사내가 아니었다. 또랑또랑한 나무의 말을 전해주던 남자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이번엔 내가 떠날 차례일지 모르겠다. 그러려면 심신이 굳건해져야겠지. 삼겹살과 새콤한 환타를 먹으면 그리될 것이다.
빌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도 이젠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고 머리마저 지끈댔다. 한여름 날씨 탓에 온몸이 땀에 젖어 서두르라는 사장의 무전이 짜증을 더 부추겼던 한마디로 지랄 같은 오후였다.
파출소에서 연락이 온 건 5시 알람이 막 울렸을 때였다. “아버님이 집이 어딘지 기억나질 않는다고 찾아오셨어요.” 소주병을 들고 있긴 했지만, 술에 취한 것 같진 않다고 했다. 마지못해 퇴근을 허락한 사장은 염려보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까지는 퍼티 작업을 끝내야 내일부터 페인트를 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은 작업은 한 시간이면 충분했음에도 사장은 로프맨 한 명을 더 불러야 할 것 같다며 엄살을 부렸다. 일당을 다 못 주겠단 속내가 훤히 보였지만 대꾸조차 귀찮아 고개만 끄덕였다.
파출소 문을 열자 에어컨 온도를 얼마나 낮췄는지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드님 번호를 외우고 계셨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어요, 어르신.” 나를 발견한 아버지는 소주병을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별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떤다고 경찰을 나무랐다. 파출소를 나서는 아버지의 귀밑으로 땀방울 하나가 조심스레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보도블록 한 칸씩을 양발로 채우며 교묘하게 금을 비켜 걸었다. 왼발을 내디디면 오른발은 더 내디디지 못하고 왼발이 디딘 곳까지만 따라갔다. 앞지르지도 뒤따르지도 않은 채 나도 같은 속도로 걸었다. 주머니에 쑤셔 넣은 소주병과 집에서부터 1km쯤 떨어진 거리. 아버지가 여기까지 왜 왔는지 도무지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사소하게 기억을 잃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의사는 별것 아니라고 말했다. “햇볕을 많이 쬐면 좀 나아질 겁니다. 머릿속에는 기억을 담당하는 뇌가 따로 있는데 그게 햇빛을 받으면 훨씬 활발해지거든요.” 사람들이 화창한 날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그런 이유라며 운동도 꾸준히 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검사 결과가 못마땅했는지 이 더운 날 햇빛에 운동까지 아주 바싹 말라 죽겠다며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그럼 수영이 좋겠네요.” 의사가 자기 생각이 짧았다며 껄껄 웃었다. 진료실을 나설 때 의사가 나를 불렀다. “당장이야 괜찮지만, 점점 더 나빠질 겁니다. 될 수 있으면 혼자 두진 마세요.” 마땅히 돌봐줄 사람이 없다면 요양원을 알아보는 편이 훨씬 안전할 거라고 했다. 구에서 운영하는 수영 재활프로그램에 등록한 게 그때였다. 안 그래도 오른팔이 굳어 어설픈 왼손 수저질이 꼴 보기 싫던 참이었다. 요양원을 알아보기 전에 뭐라도 해줘야 내 속도 편할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보도블록의 경계를 지키며 걸었다.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뭘 어찌 물어야 기분을 거스르지 않을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진 언짢으면 입을 닫았고 나도 살갑게 말을 섞는 편이 아니었다. “약주 한잔하실래요?” 이 말도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자는 늘 그렇듯 또 말없이 밥을 먹을 것이고 텔레비전을 볼 것이며 잠자리에 들 것이다. 아버지가 무슨 꿍꿍이냐며 반바지를 추켜올렸다. 소주병의 무게를 감당키 버거웠는지 바지가 슬금슬금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설마 이걸로 나눠 먹을 생각은 아니지?” 어림없다는 말투였다. 집까지 걷다 보면 널린 게 술집이었다. 아버지는 편하게 집에서 먹겠다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에이 망할 년”이라며 미간을 찡그렸다. 시장통 마트는 소주 한 병에 1,200원인데 어떻게 동네 장사하면서 1,700원씩이나 받아 처먹느냐며 역정을 냈다. 모든 건 어처구니없게 500원 때문에 벌어진 일 같았다. “봉지에라도 좀 담아 달라 그러죠?” 아버지는 주머니에 든 소주병을 움켜잡고 바지를 또 한 번 추켜올리더니 그것도 50원이라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어쩌다 이리 궁상맞아졌을까. 사찰이나 내로라하는 종갓집에서 웃돈까지 주며 일을 맡겼던 대목수가 아니었던가. 초봄부터 시작해 서리가 내릴 무렵 한 해 일을 끝내면 다음 해 초봄까지 술집에 묻혀 사는 한량이었지만 따르는 일꾼들이 꽤 많았다. 밑에 있는 목수들이야 제 품삯은 고스란히 집으로 보내고도, 술이며 세끼 밥에 운 좋으면 술집 여자와 눈까지 맞아 질펀하게 한 계절을 보내니 따르지 않을 이유가 딱히 없었다. 돈이 없어도 아버지의 씀씀이를 아는 술집들은 인심 쓰듯 외상 술상을 차려냈는데 그게 모두 다음 해 벌이를 담보삼자는 장삿속이었다. 예쁘장한 작부를 미끼로 외상술값을 독촉하다 비위라도 거슬를라치면 다른 술집에서 돈을 융통해 셈을 치르고는 아예 발길을 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500원과 봉툿값 50원이라니······. 명성이 자자했던 도편수치고는 구질구질하기 이를 데가 없어 보였다.
족발은 양이 많고 치킨은 소주랑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런 이유로 시큼한 꽁치 김치찌개를 고집했다. 한여름 밤이었다. 이 더운 날 굳이······. 이열치열. 아버지는 그게 복날 삼계탕 같은 거라고 했다. 그럼 삼계탕을 시키겠다고 하자 말할 게 있다며 멈춰 섰다. 걷기가 버거웠는지 숨을 길게 몰아쉰 아버지가 말했다. “난 닭고기 못 먹는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라고 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김치 한 봉과 꽁치통조림 그리고 소주 한 병과 즉석밥을 샀다. 누군가에게 망할 년이 되어버린 편의점 주인이 영수증을 건넸다.
오붓이.
나는 아버지와 그리 앉아 술잔을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둘 다 말이 없었고 서로가 편치 않았으며 피가 섞였으니 부자이고 그런 까닭으로 같이 사는 것뿐이었다. 세상의 모든 부자가 한집에 사는 건 아니지만 몸도 불편한 노인네를 모른 척할 만큼 증오하는 것도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지낸다는 게 제대로 된 표현일 것이다. 그러니 술자리가 편할 리 없었고 소주는 번번이 목에 걸렸으며 원래 물으려 했던 그러니까 언제 또 기억이 깜빡깜빡했는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일은 없었는지 묻지도 못한 채 애꿎은 안주와 술만 축냈다. 아버지도 찌개에 말은 밥을 안주 삼아 술잔만 비워 댈 뿐 별말이 없었다. “혼자 먹게 놔두지 쓸데없이······.” 할 말도 없으면서 술은 왜 먹자 했는지 투덜대는 걸 보면 아버지도 편치만은 않은 눈치였다. 우리 부자의 서먹함에 대해 굳이 따진다면 아버지의 역마살 때문 아니겠냐며 책임을 떠넘겼다. 만날 밖으로만 돌았으니 묻는 법도 대답하는 법도 우린 서로 서툴렀다.
“목수라는 직업이 원래 그렇지 뭐.”
“아버지만 그럴걸요.”
“소목들이야 가게에서 장롱이며 반닫이며 손 가는 대로 만들어 판다지만 나 같은 대목들이야 절도 좋고 고택도 좋고 그렇게 떠도는 게 팔잔데 어쩌겠냐. 죄라면 솜씨가 좋은 게 죄지. 널 비운사에 맡긴 것도 나 같은 떠돌이 팔자 닮을까 싶어서였어.”
“맡긴 게 아니라 버린 거죠.”
잘 돌봐달라고 설선당에 약사전까지 전각을 두 채나 보시했는데 그게 어떻게 버린 거냐며 발끈해 그만 따져 묻기로 했다. 심사가 틀어지면 또 입을 닫고 말 것이다.
꽁치 김치찌개는 식어 비릿했고 소주는 반병이 채 안 남았다. “꼴랑 한 병 사 왔나?” 내일 출근하려면 그만 자라며 아버지가 소주병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술 욕심이 원체 많았다. 하긴 그랬으니 시장통까지 갔다 길을 잃었으리라. 한 번쯤은 확인하고 싶었다. 무심했던 걸까 모질었던 걸까. 술이 더 필요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을 나서려 할 때 아버지가 쭈뼛대며 말했다. “출근하려면 한 병이 적당한가. 그래도 한 병은 부족하지 싶은데······.” 어색하고 어중간했으며 명령도 부탁도 아니었다.
편의점에서 소주 세 병과 마른오징어 그리고 홍어 무침 한 봉을 샀다. 대화가 매끄러워지기까지 또 얼만큼은 서걱거릴 것이다. 우리 부자의 서먹함이 시작된 건 산사에 내렸던 낭만적인 눈 때문이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배경과 상황. 어정쩡하게 팔을 벌렸고 엉성하게 안겼던 의미 없는 행동. 내 경험으론 출발이 잘못되면 항상 되짚어야 했고 그래서 늘 시작이 중요했다.
찌개를 데우고 홍어 무침은 접시에 담았다. 소주 한 병은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 두 병과 마른오징어를 술상에 올렸다. 아버지는 두 병이면 천원인데 빈말이라도 깎아 달라고 해보지 그랬냐며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이 넉넉해서인지 목소리가 훈훈했다. “그 오백 원 아끼자고 파출소까지 가셨어요?” 아차 싶었다. 아버지는 잔을 거푸 비우더니 오징어만 질겅질겅 씹어댔다. 나도 잔을 비우고 오징어만 씹어댔다. 방안이 정적에 휩싸이자 아버지가 리모컨을 찾았다. ‘한옥에게 길을 묻다’라거나 ‘나는 자연인이다’가 방영되면 술자리는 파장 날 게 뻔했다. 아버지는 산이나 절이나 한옥이 나오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고개 한번 안 돌리고 집중했다. 텔레비전이 켜지면······대화는 단절되고 말 것이다. 한 잔을 더 비우자 조급함 때문인지 취기와 객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찌개를 한 술 떠먹고는 안 드실 거면 치우겠다며 일어났다. “홍어는 맛도 못 봤는데······.” 다급한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난생처음 술잔을 쭉 내밀었다. 빤히 쳐다보던 아버지가 잔을 부딪치더니 한입에 털어 넣고 홍어를 우물거렸다. “이 정도면 훌륭하네. 먹고 싶었는데 잘 사 왔다.” 아버지가 속내를 내비쳤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잘려나가 있지도 않은 발가락이 근질거렸다. “근데 내 발가락 잘린 게 왜 아버지 탓이에요?” 서걱거림이 그런대로 사라져서였을 것이다. 쉽게 답해줄 것 같았고 예상은 틀리지 않았지만,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팔자가 칠십 전까지는 지독한 겁살이 낀 팔자래.” 가족을 해할 수도 있다는 겁살(劫煞). 아버지의 겁살은 기세가 하늘을 찔러 한 지붕 아래 누우면 화를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실부모에 아내까지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했다. “천막에서 같이 보낸 하룻밤 때문에 네 발가락이 잘린 거야.” 겁살 있는 사람들이 그래서 역마살이 많다는 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미신 때문에 생이별을 한 꼴이잖은가. 화가 날 줄 알았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허탈해서였다. 술기운 덕분인진 몰라도 어쨌든 두꺼운 벽을 조금은 허문 기분이었다. 모든 게 나 때문에 그랬단 말 아닌가. 경계를 허문다는 건 신중함보다 약간의 용기와 이해와 사소한 바람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사장에겐 담배를 조금 줄이라고 해야겠다. 영석이 형 기일엔 우울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 정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없어진 발가락이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 오래된 나무가 이제 내게 말을 걸었으면 좋겠다. “난 진짠 줄 알았거든요.” 포크로 홍어를 꾹 누르던 아버지가 말했다. “진짜다.” 솔깃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아졌다. 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도 나이가 너무 많아졌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아버지는 담배를 끊었다. 나는 발가락 몇 개가 없어졌고 아버지는 머리카락 대부분이 없어졌다. 많은 게 변했는데 아버지의 거짓말은 한결같았다. “진짠데 못 믿는구나.” 아버지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나무가 말을 한 건 사실이고 그 소리를 들은 건 엄마라고 말했다. 날 내팽개쳐 둔 채 떠돌았던 것조차 엄마의 유언이었다며 모든 걸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엄마에게 떠넘겼다. 확인할 방법도 없는 철벽 방어였다. 나에게 엄마는 한 번도 그리워하거나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존재 자체가 무(無)인 대상이었다. 아버지도 낯선데 엄마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