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앵두나무 열매와 주목 5

이야기 다섯

by 안광근

늦은 출근으로 남겨진 벽은 오전부터 해가 들이치는 동쪽 외벽뿐이었다. 아버지와의 술자리가 화근이었다. 더욱이 건물 동쪽은 벽화가 들어가는 자리라 오늘까지 밑칠을 끝내야 화가들이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사장은 이번 일만 잘 끝내면 계약직 채용을 약속했다. 일용직에서 벗어나 계약직만 된다면 위험수당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더 높은 빌딩, 그러니까 100m 정도의 높이쯤으로 올라가 롤러와 페인트통 대신 스퀴즈와 스펀지를 잡을 것이다. 그곳의 바람은 30m쯤에서 느끼는 바람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걸 오래전 경험으로 깨우쳤다. 소리까지 동반한 바람이 살결에 부딪히는 촉감을 떠올리자 심장이 두근댔다. 스펀지로 먼지가 떡이진 유리창을 훑어 내리는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졌다. 비가 온다고 해도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으며 휴일에 일한다면 특근 수당을 받을 것이다.

작업 상황을 보고하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동쪽 외벽 종료까지 두 시간 예상합니다. 이상.” 속이 울렁거려 점심을 건너뛰고 일한 탓인지 나머지 외벽들과 진도가 비슷했다. “오케이. 끝나고 회식 이상.” 조급함이 사라져서인지 사장의 무전 때문인지 허기가 밀려왔다. 아버지의 속도 숙취로 난리였을 것이다. 해장은 했는지, 수영장은 잘 다녀왔는지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벌써 두 번째였다. 무심해지려 해도 자꾸 신경이 쓰이고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회식을 하다말고 집으로 돌아온 건 아버지의 핸드폰이 계속 꺼져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외출을 했다면 전등을 켜놓았을 텐데 캄캄했다. 어딘가로 또 훌쩍 떠났거나 어느 거리를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안이 엄습했다. 편의점에도 파출소에도 흔적이 없었다. 스포츠센터로 달려가 아버지 이름을 대며 다녀갔는지 물었다. 직원이 이름을 듣더니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 했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그만 나오셨으면 해서요. 민원이 빗발칩니다.” 수영복도 안 입고 알몸으로 입장했을 땐 다른 노인들도 드물게 그런 경우가 있어 그러려니 했다고 한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여자 탈의실로 들어가 한바탕 난리가 났다는 말에 아버지는 어찌 됐는지 물었다. “파트타임 강사가 모시고 나갔다고 들었어요.” 집에 가셨을 거라는 말에 나는 안 왔다고 대답했다. 직원이 잠깐만 기다려보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맞아요, 그 어르신. ······네. ·····. 네.” 직원이 전화를 끊고 어딘가로 다시 전화했다. “재활팀 정훈 쌤이 어르신 부탁했다며. ······. 어. ······. 알았어.” 직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화를 끊고 또 전화를 걸고 또 전화를 끊었다. “잠시만요.” 그리곤 어디론가 후다닥 뛰어갔다. 직원을 따라 2층으로 뛰어 올라가자 수영장이 내려다보이는 관람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한쪽에 그러니까 기둥 때문에 그림자가 생겨 잘 보이지도 않는 귀퉁이에 아버지가 멀뚱히 앉아 있었다. 여기서 뭐 하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날 쳐다본 아버지가 씩 웃었다. “수영선생님이 너 금방 온다고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해서······.” 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파트타임 강사들이라 다른 센터 수업이 있어 서두르느라 경황이 없었나 봅니다.” 내게 연락하는 걸 서로 미루다 아예 잊고 만 것 같았다. “여기 조금 앉아 있다 가겠습니다.” 직원은 상관없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사무실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반바지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술도 안 마셨는데 다리에 힘이 왜 이리 없는지 모르겠다.” 원망은 말아 달라는 눈빛이지만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집에 안 갈 거예요?” 소리를 빽 지르자 의자에 손을 짚은 채 팔과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일어난 아버지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통유리 너머 텅 빈 수영장엔 조명마저 꺼졌다. 아버지를 업고 스포츠센터를 빠져나왔다. 주차장을 지나 큰길로 접어들었지만, 아버지도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없어진 발가락들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비운사에서도 아버지와 보낸 밤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 발가락이 잘린 건 겁살 때문이 아니에요.” 네 엄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절에서야 부처님이 보살핀 거지. 네가 나무의 소리가 들린다고 할 때마다 얼마나 무서웠는데. 아버지의 목소리는 은밀하고 진지했지만, 나무가 하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없었다. “정말 한 번도 없었다니까요.” 네 엄마를 주목 밑에 묻었다. 난 너한테 말해준 적이 없고. “그래서요.” 비운사에 널 맡기던 날 내가 했던 나무 얘기는 모두 네게 들을 거야. 네가 하도 안 떨어지려 해서 그 얘길 그대로 해줬을 뿐이고. “난 그런 적 없거든요. 미안하단 말이 그렇게 어려워요.” 접신이 끝나면 매번 기억을 못 하더구나. 말을 떼면서부터 가을만 되면 네가 그랬어. 산앵두나무 열매를 따서 엄마한테 갈 거라고. 난 그게 네 엄마를 따라 죽겠다는 말인지 묻혀있는 곳을 찾아가겠다는 말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무튼, 탈 없이 잘 커 줬으니 고맙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대답을 기다리는데 내 귓가에 쌔근거리는 소리가 맴돌았다.

“그새 잠든 거예요. ······. 아버지?”

“왜 깨우고 난리냐. 오랜만에 달게 잠들었는데······.”

“뭔 소리예요. 나랑 여태 떠들어 놓고.”

“뭔 소리야. 너 땜에 꿈에서 깼는데. 내가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됐지 뭐냐. 하긴 꿈에 너도 나오긴 했어. 옛날처럼 쫑알쫑알 잘도 떠들더라. 너덜길도 지나고 분비나무도 지나고. 같이 한 번 안 갈래? 참 고백할 게 있는데······.”

아버지가 등에 업혀 있다. 새털처럼 가볍다. 졸리는지 고백은 하지 않고 내 어깨에 머리를 다시 기댄다. 앙금을 남겨두고 떠나옴에 대한 후회. 사선을 넘나들던 안나푸르나 남벽에선 그랬다. 우린 여전히 건기였고 회복은 난망하다. 속세의 인연은 아쉬움의 연속이라 했던가. 넘치는 건 버리고 모자라는 건 채우라고 했는데······. 등에 얹힌 건 짐인가 인연인가. 나는 지금 어떤 걸 버리고 뭘 채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걷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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