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 앱이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남기
19.03.2026
날씨: 창가에 앉으면 봄 햇살에 꾸벅꾸벅 졸기 좋은 날
상태: 만두 빚다가 손아귀 힘 다 써서 젓가락질이 안 됨
우선 한 가지 확실히 해두자. 한국은 손가락이나 발가락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한 나라다. 24시간 편의점과 배달 앱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자비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정반대다. 여기는 ‘내 손’이 아니면 입에 들어오는 게 없는 아주 정직하고도 피곤한 나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48살 먹은 아빠는 오늘도 부엌에서 '생존 요리'라는 새로운 보직을 수행 중이다.
저녁을 먹다가 아들이 폭탄선언을 했다.
"아빠, 나 오늘 학교에서 중국 친구가 가져온 만두 먹었는데 진짜 맛있더라. 우리도 해 먹자!“
이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한국에 계신 분들은 모를 것이다. 한국에서 "만두 먹고 싶어"는 배달 앱을 열라는 신호지만, 여기선 나에게 떨어지는 '작전 명령'이다.
왜 하필 만두였을까. 아니다, 꿔바로우가 아닌 것에 감사하자. 만두는 도전이라도 할 수 있지, 만약 꿔바로우였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가출을 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지 말자. 말이 씨가 된다.
결국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두 빚기에 도전했다. 다행히 냉동 만두피를 팔길래 망정이지, 밀가루 반죽부터 해야 했다면 나는 그 길로 비행기 표를 알아봤을 것이다.
유튜브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당면을 불리고, 숙주를 데쳤다. 물기를 짜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 짜고 또 짰다. 도마 위에서 양파, 파, 부추, 마늘이 차례로 썰렸다. 두부와 고기까지 모이니 그래도 그럴듯한 속이 완성되었다.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만두를 빚었다. 각자 취향대로 만들다 보니 옆구리가 터진 녀석들이 속출했다. 결국 정석대로 만든 놈들만 살아남았다. 속을 만들 땐 허리가 끊어질 듯 힘들었지만, 도란도란 둘러앉아 있으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아주 잠깐.
사실 며칠 전에는 아이들이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다. 여기도 다행히 KFC와 맥도널드가 있다. 그 말은 즉, 마음만 먹으면 포장을 해와서 집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대한민국 운전자들의 무적 권법인 갓길 주차 후 비상 깜빡이가 여기선 통하지 않는다. 여기는 단속 카메라는 없다. 하지만 어느 날 집으로 고지서가 날아온다. 과태료는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금액이다. 그렇기 네덜란드에서 운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착실하게 주차장에 주차를 한다.
그렇다고 주차비가 저렴한 것도 아니다. 주차비는 사악하다. 박물관이나 놀이동산에 가도 주차비를 내는 나라다. 1~2천원이 아니다(기본 10~15유로). 끔찍한 물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쓰겠다. 그 말은 치킨 한 마리도 편안하게 먹기 힘든 나라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치킨을 먹고 싶다는 말은 나 보고 이번에 치킨집 사장이 되라는 말이다.
결국 나는 또다시 기름 가마솥 앞에 섰다. 아이들은 "아빠 치킨이 KFC보다 맛있다"는 치명적인 칭찬(을 빙자한 가스라이팅)을 날렸고, 나는 그 말에 홀려 닭을 튀기며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외쳤다.
이제 이곳 생활도 고작 몇 달 남았다. 한국 돌아가면 다시는 내 손으로 만두를 빚거나 닭을 튀기지 않으리라. 클릭 한 번이면 문 앞에 음식이 배달되는 그 문명의 이기를 미친 듯이 누릴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아이들이 내가 만든 만두를 입 터지게 밀어 넣는 모습을 보면, 나중에 한국의 편리함 속에서도 이 고달픈 아른헴의 주방이 가끔은 그리워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마 무릎과 허리의 통증이 뇌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것이리라.)
감상은 여기까지. 내일 아침 아이들의 배꼽시계는 어김없이 울릴 테니까. 나는 오늘도 주방 조리대 앞에 서서, 17년 차 공무원의 행정력을 총동원해 내일의 식단표를 짠다.
"자... 만두는 끝났고, 내일은 또 무슨 요리를 하나.“
전직 취사병이자 현직 화란댁인 아빠 주방장의 고뇌는 오늘 밤도 주방 스탠드 불빛 아래 짙게 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