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변화는 앞서 가는데 현황은 걸음마
나의 글은 때늦지 않게 결혼하고 출산하고 직장을 포기 않고 끝까지 간 생존자의 경험에 대한 것이다. 그 여정의 여러 문제들, 특히 가정과 직장생활을 지혜롭게 양립하기 위한 나의 경험과 조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지금은 결혼과 출산, 평생직장에 대한 것은 모두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그때는 당연했던 것이 지금은 선택과 고민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경험과 조언은 X세대의 워킹맘에게 공감을 줄 수 있으나 3,4십대의 여성들의 공감을 살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한편으론 젊은 세대의 선택 옵션의 확대는 반가운 일이다.
지금은 우리 세대와 비교해 좋아진 것이 많다.
결혼의 적령기 개념이 사라지고 난 후 조직에서의 승진 시기를 고려하여 결혼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 후 출산이 당연시되던 문화가 사라지면서 부부 중심의 노 키즈 족도 자연스럽다. 출산을 한 경우에 휴가도 2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남편의 출산휴가! 시행초에는 쏘아보는 눈초리와 은근한 불이익으로 인해 주저하는 남편들이 많았겠지만 지금은 한결 나아졌으리라. 정말 반가운 일이다. 나는 현직에서 육아휴직에서 돌아온 남자 직원을 보고 “참 잘했다,”라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결혼 후 시댁 관계도 진전이 있었다. 과거에는 명절에 시댁 방문은 필수이고 친정에 가는 것은 옵션이었다. 양가에 드리는 봉투의 두께도 달랐다. 요즘은 명절에 각자의 부모님 댁으로 따로 출발하는 부부도 있다고 한다. 많은 변화를 실감한다.
조직에서의 여성리더 진출도 눈에 띈다. 금녀의 영역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고 기회의 평등도 진행 중이다. 금년초 상장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이 5%를 넘어섰다며 고무적인 현상임을 강조하는 기사들이 있었다. 참 웃기는 일이다. 50%도 아니고 6% 수준을 축하해야 하다니! 아직 갈 길은 멀다. 이것도 한 30년이 지나 여성 임원이 50%를 넘어서면 가당치 않은 스토리로 회자될 것이다.
여성을 위한 제도의 변화, 조직에서의 위치에 큰 진전이 있었지만 과연 충분히 평평한 문화, 사회가 되었는가? 아쉽게도각종 통계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20.4월에 발표된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15세에서 54세의 기혼여성 중 전체 인원의 17.4%인 144만 명이 경력단절 여성이다. 이들이 회사를 떠난 이유 중 단연 압도적인 것은 육아(42.5%)이다. 결혼이 27.5%, 임신 출산이 21.3%, 자녀교육이 4.1%, 가족 돌봄이 4.6%이다. 세상에! 회사를 떠나 이유의 거의 100%가 결혼과 출산, 자녀와 관련된 것이다.
이 숫자를 보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30여 년간 무엇이 변했는가?
솔직히 우리 세대가 경력을 이어 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조직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대단한 의지는 아니었다. 무일푼에서 시작했기에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했고, 무엇보다 출산휴가가 70일이었기 때문에 고민의 시간이 짧았던 것이 회사로 복귀했던 큰 원인이었다.
지금은 자녀 둘을 출산하면 내리 4년 이상을 휴직한다. 그러다 보니 복귀를 앞두고 의사표현이 또렷해지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 자녀를 보면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긴 공백 이후 회사생활 또한 자신감이 없어질 수도 있다. 한마디로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회사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아이러니다. 여성을 위한 출산휴가 제도가 여성의 선택의 폭을 넓히지만 외려 경력단절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이 되기도 하다니 말이다.
또 하나의 통계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 워킹맘의 고달픔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의문이 든다. 2022.4.19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1년 양성평등 실태조사’ 결과에서 12세 이하의 아동이 있는 가족의 일평균 가정 돌봄시간이 남성은 1.2시간, 여성은 3.7시간이다. 여성이 퇴근 후 가사일과 육아에 보내는 시간이 남성의 3배가 넘는다.
그나마 위의 것은 평균치이기 때문에 실상은 워킹맘이 거의 육아와 가사일을 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음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실제 행동이 아닌 의식 수준을 살펴보자. 맞벌이 가구 중 65.5%의 여성이 가사와 돌봄이 대부분 여성의 부담으로 생각한다는 통계이다. 남성의 경우는 59.1이다. 여성 스스로가 가사 돌봄의 부담이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다는 인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나마 가족 생계에 대한 책임의식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5년 전과 비교할 때 가족 생계를 주로 남성이 책임져야 한다는 비율이 42.1%에서 29.9%로 크게 줄었다. 더 놀라운 것은 자녀에 대한 주된 책임이 직장여성에게 있다는 생각은 5년 전 53.8%인데 비해 현재 17.4%로 줄었다. 놀라운 인식의 변화이다.
두 통계를 보면 확연하다. 인식의 획기적인 변화는 있으나 그에 따른 행동의 변화는 미미하다. 한마디로 알고는 있는데 실행하지는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일하는 여성의 가족 돌봄 시간은 큰 변화가 없는데 가족 생계에 대한 공동책임은 획기적으로 늘어났다니! 후배들의 삶이 더욱 고달파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니 결혼과 출산을 고민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최근 눈에 띈 기사가 있었다. 싱가포르가 우리보다 높은 출산율과 경력단절 비율이 낮은 이유는 인건비가 저렴한 이웃나라의 여성들을 가사도우미로 고용하는 데 있다고 한다. 양 국가는 공조하에 합법적으로 외국인 가사도우미의 취업이주를 장려하면서 직장여성의 출산의 고민과 가사분담을 줄여준다고 한다.
따라서 저출산을 걱정하는 대안으로 싱가포르의 해외 여성도우미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 기사의 요지였다. 하나의 해법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맘 한편 찜찜했다. 국가가 다를 뿐 결국 여성인력은 이렇게 저렴하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을까?
10여 년 전 홍콩에 출장 갔을 때 목격한 놀라운 장면이 떠오른다. 살인적인 물가의 홍콩에서 살기 위해서는 맞벌이가 필수이고 육아와 가사 돌봄을 해결하기 위해 필리핀 가정부가 대거 입국해 있었다. 그런데 이 필리핀 가정부들은 주말에 외출해야 한다. 돈도 없고 차도 없는 그 여성들을 시내 한복판의 고가다리 밑에서 각양각색의 보자기를 펼쳐 놓고 수십 명 단위로 앉아서 음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 도심 여기저기서 펼쳐진 진풍경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설명을 듣고는 맘 한구석 서글펐다. 가난한 나라의 여성은 이런 존재인가? 필리핀 정부는 그들이 보내주는 달러를 받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과 관계없이 그들의 표정은 밟았다. 진풍경을 구경하는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편안하게 어두컴컴한 고가다리 아래 누워 서로 웃으며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한 주간의 고달픔을 서로 위로하는 밝은 모습이었다. 지구촌 곳곳의 여성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당당한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노동시장의 하층에 깔린 여성들도 있고,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며 무력하게 신음하는 여성들도 많다. 이 넓은 스펙트럼상에 우리 사회에서의 여성은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지난 30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과연 일하는 여성들의 고달픔은 얼마나 해소되었을까? 문화와 인식으로 자리 잡은 모든 것들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다. 서서히 방향을 틀면서 변화해 가겠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각자 현명하게 당면의 문제들을 풀어 나가겠지만 어떻게 하면 변화를 촉진할 수 있고 그 변화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여전히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변화는 더디다. 이제 여성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9월 28일 외신이 전해준 버진 애틀랜틱 항공의 '성중립 정책'이 반가웠다. 파격의 대명사인 버진 항공사는 조종사를 포함한 모든 승무원들이 남녀 구분 없이 치마와 바지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유니폼을 선택해서 입을 수 있게 한다는 발표를 했다. 남자도 원하면 치마를 입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성 승무원의 화장과 치마 복장 의무도 폐지한 것은 물론이다.
물론 이것은 성 정체성의 자유로운 선택에 보다 초점을 맞춘 정책이지만 이와 같은 정책은 성구분을 내려놓겠다는 기업차원에서의 의지가 공표가 된 점에서 반가울 수밖에 없다. 흡사 무거운 다리를 끌며 전진하려 애쓰는 여성의 등을 시원하게 한번 떠밀어 준 기분이다. 이런 시도가 기업, 사회, 국가차원에서도 광범위하게 확장되기를 바랄 뿐이다.
"개인의 개성을 축복한다!"는 그들의 브랜드를 다시 한번 눈여겨보며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번 해외 나들이에서는 버진 애틀랜틱 항공을 이용하며 치마 입은 남성 승무원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