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엄마를 찾는 노인
이제 요양병원 봉사일에 차츰 적응해 간다.
적응하다 보니 그간 보지 못했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몇 개 안 되지만 특실이 있다.
특실은 그야말로 특실이다.
병실 출입문을 열면 대기실과 같은 조그만 완충공간이 있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야 내부로 진입한다.
커다랗고 밝은 방에는 노인환자가 누워있는 침대와 소파,
그리고 넓고 깔끔한 인테리어의 화장실, 별도의 주방, 별도의 작은 방이 있다.
이 작은 방에는 간병인의 개인공간이다.
특실이 아닌 1인실도 꽤 넓지만 그보다 작은 화장실이 있고 별도의 주방이 없기에 화장실에서
간편 조리, 설거지등을 하는 것 같다. 역시 별도의 간병인 공간은 없다. 환자의 침상 옆에
기다란 소파가 있거나 낮은 간이침대를 놓여있다.
간병인들의 빨래와 먹거리를 위한 이런저런 도구, 음식재료가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있다.
간병인의 성격에 따라 방의 컨디션이 유지가 된다.
복잡한 살림살이를 가져다 놓고 어수선한 방의 상태를 유지하는 간병인이 있는가 하면
나른 정리를 하고 깔끔하게 유지하는 간병인도 있다.
그리고 예외 없이 하루종일 커다랗게 틀어놓은 TV,
간이침대에 책상다리를 하고 올라가 TV의 드라마와 트롯 프로그램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간병인들.
우리의 봉사시간에는 잠시 방을 비워준다.
나름의 휴식시간인셈이다.
2인용, 4인용 방들도 있다.
4인용 방에는 한 사람의 간병인이 여러 환자를 돌보고 있는 듯하다.
층마다 있는 간호 데스크의 간호사들은 여유로워 보인다.
이곳에는 응급환자나 수술은 없다.
수술을 위해서는 종합병원으로 옮겨간다.
이곳은 만성의 환자들, 그리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와상 생활의 노인환자들이 일상의 약처방과
물리치료,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기거하는 곳이다. 기거! 즉 집을 떠나 살아가는 곳이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셈이다.
삶의 마지막을 머무르는 곳.
치매와 기타 여러 증상을 겪고 있는 여성 노인 환자분.
다리가 만질 곳이 없을 정도로 가늘고 피부도 쪼그라들었다.
처음에는 어디를 만져야 할지 난감했다.
그리고 이렇게 살이 없는 상태를 만지는 것이 노인의 통증을 유발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러나 반의식 상태인 이 환자는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아 순서대로 림프마사지를 해본다.
어떤 증상이 있는지 환자의 손은 커다란 벙어리장갑으로 꽁꽁 묶여있다.
그러다 갑자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길게 뽑아낸다.
"엄마, 가려워"
마사지 내내 가렵다는 말을 하는 노인, 그리고 5살 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는 노인을 마사지하며 여러 생각이 든다.
인생의 끝에 와 있는 이 노인도 엄마를 찾는구나.
가려우나 긁지 못하는 고통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엄마를 부르는구나.
어릴 때 다치고 넘어지고 서러워 울 때 엄마를 찾는 것처럼.
그래, 결국 사람은 죽음에 가까워서는 과거로, 자신이 첫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마음의 본향, 본래 있었던 곳, 엄마, 정확히는 엄마의 자궁일까?
의식이 없는 사람의 무의식을 목격한다.
하루종일 가렵다며 엄마를 찾는다며 지겹다고 툴툴 거리는 간병인.
그의 억양도 영략 없는 연변이다. 여긴 온통 연변사투리다.
이미 초고령사회로 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 간병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간병인, 요양보호사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늘어나고 있고 그 중심에는 연변출신들이 잡고 있구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다.
가족들은 거의 발길을 하지 않고 24시간 노인과 같은 병실에서 생활하는 그들.
내내 TV를 틀어놓고 간이 침대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 가기를 기다린다.
이런 간병인들에게 '엄마 가려워'를 수도 없이 대뇌이는 노인에게 어떤 측은한 감정이 들겠는가?
잠깐 왔다가는 나의 경우와는 다르겠지.
그들의 삶 또한 이해된다. 제법 큰돈을 받을 수 있고 그리 큰 노동이나 험한 일은 아니니 직업치곤 좋은 조건일 것 같다.
그러나 노인과 한 방에서 24시간을 떠나지 못하고 있어야 하는 갑갑함,
자유를 잃은 생활.
무엇보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 찬 곳에서의 24시간.
어떤 이는 차라리 몸이 힘든 직업이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가렵다며 계속 엄마를 찾는 이 노인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노인전문병원에 입소했다면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생활을 했겠다 싶다.
그러나 죽음은 경제력과 관련 없이 다가오는 것.
아니다. 죽어 가는 과정의 죽음의 질도 경제력에 좌우된다.
돈이 없으면, 궁핍하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매우 고달프고 비참할 것이다.
그래서 늙어서 돈이 중요한 것일까?
하지만 이것이 정작 본인에게도 중요한 것일까?
일본 최고의 노인전문의사인 와다 히데키가 최근 쓴 책 <60세의 마인드셋>이 생각난다.
은퇴 후 돈을 아낌없이 쓰자.
늘어난 수명과 불안감으로 가진 자산을 꼼짝없이 통장에 재워둔 노인들에게 그는 권한다.
60대, 70대에 가진 돈을 맘껏 쓰자.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젊을 때 누렸던 것만큼 쓰자. 아니, 그 이상을 쓰자.
건강수명인 70대 중반이 지나면 돈이 있어도 쓸 수가 없는 상황이 온다.
고이 모아둔 그 돈으로 고급 요양병원에 갈 것인가?
활력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는 요양병원의 생활에 아낀 자산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노인복지가 잘 되어있는 일본의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도 기초연금, 노인연금, 국민연금이 있다. 주택연금도 있다.
생각보다, 우리의 불안감보다 우리는 더 조심하고 불안해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히데키의 말대로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생각만 하지 않으면
3,4십 년을 성실하게 일해 은퇴를 맞이한 사람들은 막연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노년에 대한 불안, 공포가 비로소 인생의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있지는 않는가?
이렇게 되면 죽을 때까지 걱정과 불안으로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생이 끝나는 것이다.
아!
나도 이제 돈 좀 써야겠다.
60대 초반.
가끔의 외식에서 메뉴판부터 보는 나의 작은 습관부터 버려야겠다.
실은 메뉴판보다 그 옆의 가격부터 빠르게 스캔하는 나.
이제부터 먹고 싶은 것,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선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히데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오랜 습관, 자녀에게 물려주겠다는 생각 등을
단절시키는 방법으로 상속세 100%라는 특약처방을 외친다.
즉 남긴 자산은 모두 세금으로 환수한다는 말이다.
다소 무리가 있는 발상임을 알면서도 그는 노인의 삶의 질, 즐거움, 활력 있는 삶을 위해
과감한 제안을 한다. 돈을 움켜쥔 노인이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침체된 내수경기에 활력을 불어놓는 것은 덤이다.
죽음에 가까이 갈 때 나는 굳이 좋은 요양병원이 아니어도 되겠다 싶다.
어차피 뇌의 기능이 쇠퇴하고 육체의 기능도 거의 상실한 상태에서 좋은 서비스를 인지조차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또한 자식들의 체면치레일수 있다.
지금 여기 누워있는 노인들은 어떻게 젊은 노년을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