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월 나는 명동성당 성물방 밑 건물에서 신학교 입학원서 접수를 받는 사목국장 신부님과 말싸움을 하며 옥신각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정 점수에 미달하기 때문에 원서접수 자격이 없다며 돌아가라는 신부님의 말씀에 나는 입시요강에 그런 내용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며칠 동안 건강검진, 본당 신부님 추천서 등 서류를 준비해왔으니 원서접수를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신부님은 원서 접수를 받지 않으셨다. 접수받은 원서를 버리셔도 좋으니 접수는 받아 주시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신부님은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결국, 나는 원서접수를 하지 못한 채 나왔고 명동성당 안에 들어가 예수님상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다 밖으로 나왔다.
고1 때부터 2학년 때까지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고 천국의 열쇠 치셤 신부를 꿈꾸며 신학교에 지망하려 하였으나 그해 시험성적이 좋지 않았다. 재수하려 하였으나 내 정신적 지주였던 우리 성당 소속 신학생이 하느님의 뜻은 모르니 일단 지원해 보라고 해서 원서 준비를 했는데 접수조차 하지 못하고 깊은 상처를 받고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사목국장 신부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톨릭 신학대학 입시요강에 최저점수에 관한 내용은 분명히 없었고 서울대도 지원자가 미달일 경우 아무리 점수가 낮아도 합격하던 시절이었다. 신부님은 왜 규정에도 없는 점수를 말하며 원서접수조차 받지 않는지? 그것이 예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그해 신학교 입학 합격자 최저점수는 사목국장 신부님이 말씀하셨던 점수였지만 미달이었고 성당 사람들은 내가 원서접수를 한 줄 알고 합격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내가 원서접수를 못 했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다음 해, 그다음 해에도 신학교를 지원하지 않았다. 처음엔 재수 공부를 했지만, 목표를 잃고 공장에 다니다 군에 입대하였고 86년 제대 후에도 신부의 꿈은 버리지 않았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긴 방황의 늪에 빠져 기계공장, 인쇄소, 책 대여업 등을 하다 1988년 시골에 내려가 살려고 정읍에서 양계하는 이모부와 외삼촌 일을 도우며 내 몫의 가축을 키우고 있었다. 2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자본도 없이 농촌에 정착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저녁에 독서실에서 몇 달간 공부해서 전주교도소 교정직 9급 시험에 응시했고 무난히 합격하리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다른 지역에선 안정권인 점수였는데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에는 큰 공장과 사업체가 거의 없어 공무원 시험 합격선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다.
정읍에서 생활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91년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고려대병원에서 수술하셨고 집안에 우환이 들었는지 여동생이 회사에 출근하다 넘어져 발목 골절, 아버지는 손을 다치는 등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 발생했다. 나는 장남으로서 불효한 지난 세월을 반성하며 어머니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읍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키우던 가축을 다 정리하고 나니 천만 원 조금 넘었고 어머니 병원비에 보태 쓰시라고 드렸다. 다행히 어머니 병환은 괜찮아졌으나 내가 문제였다. 흙수저 집안에서 가진 것 없는 고졸 출신으로 뚜렷한 직장도 없이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촌 누나 정육점, 사촌 형 공장 일을 가끔 도와주며 방황하던 차에 원주교도소에 다니던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92년 9월 말이었던 것 같다.
11월 초에 교도관 시험이 있는데 응시하라는 것이었다. 한 달 조금 넘게 남아 어렵지 않겠냐? 고 말하자 전주교도소 시험 칠 때와 똑같은 과목이니 집중해서 공부하면 가능성 있다고 말하며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응시해 보라고 하였다.
1988년 당시 교도관 근무체계는 2부제였는데 야근을 하고 퇴근해야 할 교도관들이 호송 근무를 하다 지강헌 사건이 발생하였고 1989년 교도관 근무체계가 3부제로 바뀌면서 교도소별로 특채 형식으로 시험을 시행하여 많은 인원을 채용하였고 친구는 내가 소년교도소와 잘 맞을 것 같으니 천안에 있는 소년교도소에 응시하라고 말하였다. “시험이 언제냐?” 고 물어보자 11월 9일이라고 하였는데 여동생 결혼식 날이었다. 내가 친구에게 여동생 결혼식 날이라 안 되겠다고 말하자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은 여동생이 “내 결혼식보다 오빠 직장 잡는 게 우선이니 개의치 말고 시험에 응시해”라고 말했으나 당시 남동생이 군대에서 휴가 나와 미복귀하여 몇 달째 어디 있는지 소식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시험에 응시하면 오빠와 동생이 참석하지 않는 결혼식이 되기 때문에 안된다고 말하였으나 옆에서 듣고 계시던 부모님께서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니 시험에 응시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고 생각해보니 공무원 9급 시험 나이 제한이 29세라 마지막 주어진 기회여서 원서접수를 하고 시험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 평생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은 없었다.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였고 1992년 1월 나는 천안소년교도소 교도관으로 임용되었다.
소년교도소 교도관 생활은 내 적성에 맞았고 지금도 나는 친구와 여동생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비록 실패했지만, 정읍에 있을 때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해 준비했기 때문에 한 번의 실패 뒤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성취하려 노력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기회가 오고 하늘이 도와주신다고 믿고 있다.
군대 제대하고 29살까지 기계공장, 인쇄소, 도서대여점, 농장 생활, 그리고 시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방황했던 시간이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내 인생의 아픈 경험들을 이야기하며 소년수용자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얘기해 줄 때 소년수용자들이 내가 하는 말을 신뢰하며 잘 따랐기 때문이다.
마음속에는 항상 신부님의 꿈이 있었지만, 그 길로 가지 못했고 10여 년의 세월을 방황한 끝에 나는 교도관이 되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내가 신부가 되기에는 너무도 교만하고 아집이 세서 나를 교도관의 길로 이끄셨는지도 모르겠다. 그 길이 내가 닮고자 했던 천국의 열쇠 치셤 신부가 걸었던 길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