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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와 사랑 Sep 05. 2022

난(蘭) 이야기

  아파트를 분양받고 나서 텅 빈 앞 베란다를 바라보면서 계절별로 꽃이 끊이지 않는 집을 만들어 보리라 다짐하며 서점에서 원예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가 난(蘭)을 한번  키워보리라 작정하고 한분, 한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앞 베란다를 꽉 채워 계절별로 각기 다른 종류의 난들이(봄에는 춘란, 여름에는 풍란과 하란, 가을에는 한란, 겨울에는 보세란) 그윽하고 은은한 향을 선사하고 있다.

  현실정치에 낙담하여 낙향하는 길에 산속에서 쉬고 있던 공자가 어디선가 느껴지는 그윽하고 은은한 향기에 매료돼 그 향기의 진원지를 찾아보았더니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에서도 의연하고 고고한 자태로 피어있는 난이었다고 한다. 난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은 공자는 더욱더 학문에 정진하여 후세에 길이 남을 성인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공자를 군자의 도를 가르쳐 주었던 난, 나는 그중에서도 공자를 매료시켰다는 춘란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진화한 식물이라는 蘭 속에는 작은 우주가 담겨있다. 자연의 섭리가 담겨있다. 희생의 아름다움이 있다.

  난을 키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모촉이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난을 보며 병에 걸린 줄 알고 몹시 당황하였는데, 알고 보니 모촉이 신아(새촉)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 양분을 다 내어 주고 자신은 그렇게 말라비틀어져 떨어진 것이었다. 떨어진 모촉을 보며 우리네 부모님의 모습인 듯싶어 가슴이 찡했었다.


  난과 인연을 맺은지도 어느덧 10여 년, 세력이 불어난 난들을 분갈이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다 보니 “지란지교”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음미하게 되었다. 분갈이한 난은 세력이 약해지고 그것을 회복하려면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귀한 난일수록 회복의 기간은 길어지며 난을 분양받은 사람들이 난을 잘못 키워 실패하였을 경우, 난을 분양해준 나나 분양받은 상대방 모두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분갈이 한 난을 몇 년 나누어 주다 보니 이제는 난을 함부로 분양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난에 입문하기 전 수년간 난을 키워왔던 직장동료가 내가 그토록 난 하나만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소중하게 키우던 난을 선뜻 내줄 수 있는 만남, 분양받은 난이 실패하더라도 서로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지 않을 만남, “지란지교”란 그런 만남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정직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십오 년…….

  수많은 수용자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사회에서 병들어 교도소에까지 들어온 아이들…….

  내 성장과정이 그리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해서인지 ‘불우한 가정, 결손가정 등 좋지 못한 주변 환경’이 주원인이 되어 이곳에 온 선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에게 유난히 애착이 간다. 비록 시간이 걸리겠지만, 한번 데미지를 입은 난은 정성스레 돌보면 비록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정상적인 난으로의 회복이 가능하듯 그들도 그러하리라는 믿음으로 조심스레 아픈 마음으로 수용자들을 대해왔다.


  춘란의 계절 봄이 왔건만 베란다 난실에는 단 하나의 난만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몇 년 전 그토록 꽃망울을 잘 터트리던 난들이 작년부터 시들시들해진 것이었다. 이들이 정상적인 난으로 회복되려면 몇 년의 세월이 지나야 한다. 정상적인 난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이렇듯 의연하고 고고한 자태로 은은한 그윽한 향을 담은 꽃을 피우는 아이들도 분명히 있으리라. 나는 그들이 정상적으로 치유되기에 최고로 좋은 환경이 되어 주리라.


  내가 아는 선배, 동료 교도관들 중 많은 이들이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건 간에 주어진 환경에서 맡은 바 일을 묵묵히 처리하면서 맡으려 하면 잘 맡아지지 않지만 이리저리 오가다 보면 문득 가슴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맑고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난처럼 고고하고 의연한 마음으로 그렇게 살고 있다.

  나도 그렇게 살리라.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한 비료를 취하며 사는 난에게서 중용의 덕을 배우며, 2주일여의 꽃을 피우기 위해 240여 일 동안 꽃망울을 달고 기다리는 춘란에게서 기다림의 자세를 배우며, 난을 대하듯이 애틋한 마음으로 하나하나의 인연들을 소중히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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