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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바라기 Jan 16. 2024

9. 외면

부딪혀 보기로 했다.


겨우 다시 살아서 한번 더 사는 인생인데 좌절할 이유도 겨를도 없었다. 암 환자였던 사람한테 감히 재발하지 않겠냐며 무식하게 아무 말이나 내뱄는 이들에게 나의 학업의 자유와 10대의 끝자락을 내어주기 싫었다.


난 아팠기에 용감해졌고 더 당당해졌다.

원래도 그런 성격이긴 했지만, 이젠 정말 앞만 보고 싶었다. 꼼짝달싹 못하던 지난 세월들을 어떻게든 나 스스로에게 보상해주고 싶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이미 나의 속도는 뒤쳐졌기에 이제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학교를 설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이 병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학교로 가서 내가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보여주고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내 마음은 모 아니면 도였다. 해보는 데까지는 해봐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솔직히 끝까지 안된다고 하면 어쩌지 싶었지만 그럼 또 다른 나의 길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죽을병도 이겼는데 뭔들 못하겠나.


예상대로 냉담한 표정의 학교 입학처와 마주 앉았다. 영어를 잘 못하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면담을 들어갔다.


학교를 다닐 때 난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전 과목 대부분 A+였으니 부모님에겐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님 앞에서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입학사관의 말을 차마 전부 통역할 수가 없었다.


노심초사 옆에 앉아서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건지 눈치를 보고 있는 부모님이 계시니 속에서는 울화통이 터지는데 화도 제대로 못 냈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아도 내 부모님이 이런 대우를 받는건 용납할 수 없었다.


네가 걸린 암은 재발률이 높다고 들었는데 만약에 또 아프게 되면 우리 학교에는 타격이 크다. 스스로를 생각한다면 너 자신을 돌봐라. 우리 학교에는 피해가 갈 것 같으니 돌아갔으면 좋겠다. 등등


희망을 가지고 버텼던 십 대 소녀에게 못하는 말이 없었다. 진심 어린 (원래 미국사람들의 진심이란 없지만) 말 한마디도 없었다.


솔직히 학교에 따지고 싶은 것도 많았다. 왜 다리가 부러졌을 때 바로 응급실로 데려가지 않은 건지. 왜 나를 타이레놀 2알만 주고 12시간 이상을 방에 혼자 그냥 방치한 건지. 왜 바로 부모에게 알리지 않은건지. 도대체 아이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기숙사 학교로서의 책임을 다한건지. 소리치며 따져 묻고 싶은 부모님을 설득해 가며 일단 복학하게 해달라고 했다.


입학처의 태도는 마치 이미 학교 전체와 입을 맞춘 마냥 강경하게 돌아가라고 했다.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작에 복학이 어렵다고 했다면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난 홈스쿨링을 하지 않았을 거고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대안을 찾고 준비를 했을 거다.


의사들도 다시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다고 (심지어 미국 담당 의사도 소견서를 적어주었다) official letter를 다 보여줬는데도 재발하면 우린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복학은 안된다고 했다.


참을 수 없는 수치스러움과 분노가 일어났다. 심지어 입학사관은 내 친구의 엄마였음에도 불구하고 역겨울 정도의 냉정함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부모님이 같이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식의 태도로 말하는 걸 용납할 수 없이 화가 났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대체 이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니. 난 만약에 당신이 말하는 그런 있을 수 없는 재발이 일어나서 아프게 되면 학교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고 (암 걸리는걸 누구에게 책임을 묻겠는가???) 떠나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입학사관 단 한 명의 의견으로 내가 복학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난 전 과목 선생님들을 불러 회의를 열어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돌했지만 난 물러설 수 없었다. 내가 수업을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들이 판단하고 내가 설득해야 되는 부분들이 있다면 내가 직접 설득하겠다고 했다.


의사소통이 안되 답답하고 주눅 들어 있는 부모님은 그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말하며 속상해했지만 난 그렇게 만든 학교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학교의 자랑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아프다고 내쫓는다니. 정말 고소라도 해야 되나 싶었다.


애정하던 선생님들 30명 이상이 모인 대회의실.


부모님께는 나 혼자 들어가겠다고 했다. 모든 걸 통역해 드릴수도 없었고 들어서는 안 되는 비수 같은 말들로 엄마아빠에게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고 이 싸움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웠덤 선생님들을 보자 눈물이 치밀어 오르는 걸 냉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 꾹 눌렀다.


가족도 없이 혼자 미국 기숙사에서 공부하는 나에게 엄마 아빠 가족이 되어주셨던 선생님들. 하지만 그들도 인정보다는 그들의 직장인 학교의 입장 사이에서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계셨다..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선생님들을 설득했다. 나의 치료가 모두 끝났고 정상적으로 걸어 다니며 그전보다 훨씬 건강한 상태로 돌아왔다고. 아픈 와중에도 홈스쿨링을 꾸준히 했고 좋은 성적으로 학기를 마쳤기에 문제없이 학교 생활을 할 수 있고 내가 만약 다시 죽을병에 걸리면!!!! 미련 없이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학교와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절대 민폐 끼칠 일 안 만들겠다고. 난 simply 내 학업을 이어가고 싶기에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항변(?)했다.


나를 마치 전염병 환자 취급하며 경멸하고 고집쟁이로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 그간 남아있던 정이 한 번에 떨어졌다. 거절해도 전혀 미련이 없을 정도로..


어떤 선생은 나에게 재차 물었다. 다른 학생들에게 정말 피해가 안 가게 할 수 있겠냐고. 다른 친구들이 동요되지 않을 수 있게 할 수 있겠냐고.


이들은 정말이지.. 내가 전염병 환자로 보였나 보다. 암환자였던 아이가 학교에 돌아온다는 게 학생들과 학부모.. 선생님들한테 너무나도 불안했나 보다. 내가 아팠다는 걸로 다른 친구들에게 학업 분위기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슬펐다.

말로 다할 수 없을만큼 슬펐다.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니었는데 아팠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되는 건지.. 아프기 전과 후의 나는 같은데.. 다리가 좀 불편해지고 죽을병에 걸렸었다는 거 하나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전과 천지 차이였다. 아팠던 것도 억울한데 수치스러운 대우와 비수 같은 말과 표정에 그렇게 당당했던 나도 어깨가 처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세상은 냉정했고

다름에 대한 외면은 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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