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
다음 날 아침 수화물 보관소에 짐을 맡긴 뒤 안나 카레니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프라하의 거리를 쏘다녔다. 저녁에 그녀가 초인종을 눌렀고,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토마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 양. 자기가 가진 통행증이라곤 이 비참한 입장권밖에 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p95
밀란 쿤데라의 책에서 언급된 안나 카레니나. ‘입장권’이라는 표현이 어떤 책일까 궁금하게 만들었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봤더니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많았다. 가령 무한회귀라던가) 우연히 주어진 연휴 기간에 빨리 읽어야겠다는 약간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읽어서인지, 아니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부정적인 상념들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힘들게 읽어냈다.
이 책에는 세 가지 불행이 나온다. 처음엔 남편의 바람으로 불행해진 아내가 나오고 두 번째로 청혼에 실패한 남자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남편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아내가 나온다. 이 책이 고전 중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톨스토이의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이해 그리고 훌륭한 묘사와 비유도 있겠지만, 위의 불행들은 현대의 사회에서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편의 바람으로 불행해진 아내는 남편을 용서하고 함께 살고, 청혼에 실패한 남자는 우여곡절 끝에 청혼했던 여자와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산다. 하지만 남편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아내는 잘사는 듯 보였으나, 끝내 자살하고 만다. 이 마지막 이야기가 바로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이야기이며 메인 스토리다.
안나는 그녀의 남편 카레닌과 잘살고 있었으나, 오블론스키와 돌리 부부의 불화를 중재하기 위해 가는 길에 만난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다.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 안나는 남편인 카레닌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이 부분에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호의를 베풀게 만드는 ‘사랑’이 기적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이고 이성적인 존재다. 끊임없이 개인의 이익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인간 아닌가? 한 유부녀에게 이런 사랑이 찾아왔고 남편은 뚜렷한 잘못이 없음에도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한 남자로서 자신을 혐오하는 여자와 사는 그것만큼 비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안나는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고 산욕열로 죽을 고비를 겪으며 카레닌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때 카레닌은 안나에게 달려와 눈물 흘리며 그녀를 용서하는데, 이 부분도 나에게 많은 상념에 잠기게 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 나에게 용서란 진창길을 걸으면 으레 그렇듯 진흙이 잔뜩 붙는 신발과도 같다. 털어내도 금방 다시 신발에 달라붙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용서? 내가 카레닌이었다면 다시 안나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는 죽지 않았고 병세를 회복하자 다시금 카레닌을 혐오하고 브론스키에게로 돌아간다.
겉보기엔 안나는 브론스키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곧 아이들 문제가 불거지는데 이 부분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안나는 카레닌이 키우고 있는 그녀와 카레닌 사이의 아들을 잊지 못했고, 안나와 카레닌은 법적으로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론스키와 안나 사이의 딸은 법적으로 카레닌의 딸이었다. 카레닌은 브론스키와 안나의 행복을 빌어주어야 할까? 나는 개인적으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호주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성인 남녀 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건 자유겠지만 ‘용서’는 쉽지 않다.
누군가는 이 책이 안나에게 ‘주홍글씨’를 새겼다고도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부정으로 야기되는 차이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이건 주홍글씨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단순화시키고 싶지 않다.
레빈과 키티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으로 책은 마무리되지만 난 이 책이 상당히 어둡게 느껴졌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문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수많은 독자는 레빈, 키티 부부에게 공감했을까? 오블론스키, 돌리, 카레닌, 브론스키, 안나와 더 공감했을까? 당신은 저 문장이 어떻게 보이는가?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레빈 부부처럼 살면 된다. 레빈 부부는 시골에서 노동을 꺼리지 않으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비교적 소박하게 살아간다. 만약에 당신이 불행하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